꽃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이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언자를 보는 것도 이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 이런 식인데
이런 경우 사람을 보기보다는 ‘어떤’을 보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을 보시지 않고
사람을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물은 산이 아니고 물이며,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산이 물에 비친다고 해서 물이 산이 아니고 물 안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그런 뜻이기도 하지만 그야 말은 물과 산은 그 어떤 물과 산이기 이전에
그저 물이고 그저 산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밤을 좋아한다고 해서 밤나무가 있는 산인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산을 본다면
밤나무가 없는 산은 내게 무의하고 그래서 거들떠보지도 않겠지요?
그러니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만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고 더 높은 차원입니다.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니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보는 데 실패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데 실패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하고
놀라워하면서도 지혜와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못마땅합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수준의 말을 하고 기적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하지 못해야 하는데
자기들과 달리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향 사람들과 달리 참 신앙인이라면
무엇에서건 하느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고,
사람에게선 더더욱 하느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꽃을 보는 눈도 훌륭합니다.
꽃이신 하느님을 보는 눈은 더 훌륭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도 꽤 훌륭합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눈은 더 훌륭합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눈은 꽤 훌륭합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더 훌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더 훌륭합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