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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1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Aug 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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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1일 수요일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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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밭 임자
밭 임자는 그리 스도이시며, 하늘과 땅은 그분의 집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늘과 땅에 사는 피조물의 무리는 말하자면 그분의 식솔입니다. 그분은 지옥과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삼 층짜리 집을 지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사는 이들은 땅에서 살고, 정복당한 이들은 땅 아래서 살고, 승리하는 이들은 하늘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중간에 놓인 우리는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로 내려가지 않고 히늘에 있는 이들에게로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어떤 것을 피해야 하고 어떤 것을 행하고자 마음먹어야 할지 모를까 봐,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빛과 어둠사이에 사는 동안 이 두 가지를 다 조금씩 맛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밤은 지옥의 맛이고, 낮은 하늘의 맛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이러한 복과 창조의 전통이 바로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서 있는 전통이다. 식사의 복이야말로 복/창조 전통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경험이다. 엑카르트는 하늘나라를 천상의 잔치, 곧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 연결하여 말한다. 엑카르트는 말한다.
우리 주님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새 세상이 이루어지는 때, 인자가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게 되는 그때, 나를 따른 그대들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께게될 것입니다“(마태 19,28). 자기를 내보낸 근원, 곧 아들을 내보낸 근원에 도달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사람의 행복이 있는 곳에는 그의 존재도 있습니다. 우리도 거기에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터에서 하느님의 모든 벗은 자신들의 복을 받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터는 “하느님 나라에 마련된 식탁”입니다. 우리가 이 식탁에 이룰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223)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8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5-7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6절: 청빈운동, 이단과 이단 신문
이단 신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여러 가지가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 그리스도교 사회의 기반에 대한 공격때문에 종교 이단자는 중세인들에게 교회와 국가의 존재를 위협한 정치적인 혁명가였다. 확실히 신학자들, 무엇보다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직접적인 신앙의 강요를 철두철미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진리, 그리고
특수하게는 그리스도교적으로만 인정되는 신앙 진리를 매우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부인하고 반박하는 자들에 대해 무엇이 일어나야 했던가의 질문은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오직 하나인 객관적인 진리만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더 나은 봉사의 길은 엄격함인가 아니면 관대한 사랑을 통해서인가? 중세의 신앙인들은 전자, 즉 엄격함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루터와 멜란히톤, 그리고 특히 칼뱅 같은 종교 개혁가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이단자 신문과 마녀 박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에서 많이 있었고, 퀼른과 파리에서처럼 가혹하기도 하였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이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신앙의 위험을 극복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그들의 시대에 제시하였다.(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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