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악마의 실체
나는 내 인생의 여러 변곡점에서 공존을 헤치고 자존감을 뺏고 평화를 짓밟는 악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과거의 역사 안에서 인류가 겪은 참혹한 실상이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악과 그 악이 저지르는 실체와 직면해 있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을 본받아 어떻게 선으로 악에 저항할 수 있는가를 배우려 합니다.
집단적 이기주의와 자국 우선주의가 만든 조직적 악마인 세계의 실체, 개인의 악행과 악습, 나쁜 선택이 만들어 내는 육(肉)의 실체, 그 꼭대기에 앉아 공익과 공동선이라는 명분으로 통치하는 위선의 실체가 전쟁을 일으키고 시장원리를 조작하고 형벌 제도로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합니다. 또한 부당한 법률과 조세정책으로 개인의 재산을 빼앗고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모습으로 체제의 꼴을 갖추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헤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너무나 크고 너무 필요해서 잘못될 수 없는 무엇으로 자기를 나타냅니다. 창세기의 뱀으로부터 시작해서 차원 높은 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좋고, 매력적이고, 항상 내 편에서 덕스럽게까지 겉모습을 위장합니다. 인과응보의 틀로 도덕적 성취를 내세워 불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 안에서 살펴보면 사람들은 개인의 죄와 악행에만 주목해 왔습니다. 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될 때까지 삶의 밑바닥에 깔린 악의 기반들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고 거대한 사회 제도에 대한 강렬한 비판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의 대립과 폭력적인 사회 제도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탐욕적이고 집단 이기적인 형태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개인들이 비난당하고 형벌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라는 명분으로 저지른 착취와 인권유린은 폭력으로 개인의 자유를 빼앗고 저항하는 이들을 가두고 고문하면서 내란 죄라는 명분으로 사형시켰습니다. 이러한 악에 대해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과 정의를 외치던 이들은 피를 흘려야 했고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이와 함께 사회 변두리로 쫓겨 난 이들은 처절한 삶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독재를 정당화하는 법률이 만들어지고 합법적으로 살인을 정당화하고 폭력으로 통치했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하는지, 왜 악이 저토록 인간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지 악의 실체에 직면하여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과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지,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첫 번째 차원의 악은 세계 차원의 악입니다. 그 악을 인식하지 못하면 두 번째 차원의 악마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세계의 조직은 가장 감추어져 있고, 위장되어 있고 부정되면서도 근본 바탕을 이루는 악의 현주소입니다. 그것은 국가들이 생존하기 위하여 만든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문화와 그러한 집단들이 만든 제도이기 때문에 의심 없이 받아들인 악의 실체입니다. 현존하는 핵전쟁의 위협과 과도한 군비경쟁은 자연을 황폐화하고 식량과 물을 고갈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서민과 변두리에 몰린 이들은 굶어 죽어도 대량 살상을 위한 첨단무기를 소유하기 위해 막대한 재화를 낭비합니다. 집단이기주의는 개인 차원의 이기주의에만 머물 때 결코 악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법을 정하고 거기에 힘을 실어주는 집단이기주의는 전쟁하는 명분을 만들고, 독점과 소유로 재물을 착취하기 위한 법을 제정합니다. 여기서 태어난 독재정권과 형벌 제도와 수단들은 악마를 대신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집단이기주의라고 하지 않고 불가피한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일단 악마의 법이 제정되고 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북한의 독재가 공산주의 체제로 유지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여러 나라들과 전쟁하고, 지구 촌 곳곳에서 드러난 폭력과 전쟁 속에서 미국은 세계 경찰 노릇을 하면서 개발도상국과 가난한 나라를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과 정권을 유지하려고 강제로 뺏고 죽입니다. 이는 공존을 위한 도덕적 손실은 아랑곳 하지 않는 데서 드러난 악의 실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못 박는 사람에게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악을 저지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두 번째 차원의 악은 개인적인 죄와 실수와 잘못들인 육(肉)이 저지르는 악입니다.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만든 악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개인을 비난하고 벌을 내리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누구로부터도 비판받지 않은 채 숨겨진 사회적 합의 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중세교회가 체제를 유지하고 번영이라는 명분으로 저지른 허영과 탐욕의 실체는 너무나 커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는 이들을 단죄하고 비리와 폭력을 눈감아주면서 젊은 청소년들에게 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거나 허영을 삼가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한다면, 또 교직자들의 부끄러운 진실을 감추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뻔한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고 “들보와 티”에 대한 위선의 실체일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제도화된 범죄연대와 조직적인 범죄였고 그 다음으로 개인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가운데 특별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분은 제도화된 악에 대하여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감추어진 악은 드러내야 하고. 악은 싹부터 잘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늦습니다.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이 저지르는 살인, 도둑질, 강도, 간음, 탐욕과 거짓말 등이 제도 안에서 정당화될 때 질서는 파괴되고 인간의 자유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합니다. 어떤 조직이든 “내게 엎드려 절하라”고 한다면 그것이 교회든 국가든 아니면 시장경제이든 그 조직은 언제 어디서나 분명한 악마입니다.
악마의 술책은 속임수 위장입니다. 매우 도덕적으로 보이는 게 악마의 일입니다. 변장한 얼굴로 사람을 속입니다. 자신을 먹이고 지켜주거나 자기들의 우월감을 부추겨주는 사람은 절대로 악마일 수 없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외형의 호화로운 장례식처럼, 회칠한 무덤처럼 그 안에는 부패한 악이 선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형식적인 법과 제도에 충성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숭배를 강요할 때마다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판하신 것도 그들 안에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악은 선으로 위장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우리는 영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기에 위선을 덕으로, 거룩한 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영의 식별은 탁월한 능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필요성에 자신을 기꺼이 그리고 겸손하게 내어주는지, 도구적 존재로 관계 안에 하느님의 선이 흐르게 하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드러난 태도와 행동하는 선을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식별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악은 선에 의하여 드러납니다. 어둠은 빛에 의하여 드러납니다. 무상의 선물을 받아 주님의 영을 지닌 사람은 존재 자체로 악과 어둠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