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오늘은 왠지 삐딱한 눈으로 복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선지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눈에 거슬렸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는 표현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이 주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얘긴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해줬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도대체 루카복음이 그럴 수 있습니까?
소위 이방인을 위해 쓰였다는 루카복음이 예수님도
자기 민족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묘사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가셨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원로들의 말에 동의해 가신 것처럼 들리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그래서 다른 번역들, 200주년 성서, 개신교 성서, 영어 성서 등을
다 찾아봤는데 거기에는 <그리하여>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번역에만 있는 <그리하여 가셨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원로들의 말에 동의하셨기에 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까?
유다인의 원로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같은 민족의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공로가 있다고 하여 주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권세가 있다고 하여 주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백부장처럼 자기 하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처럼 주님의 사랑을 믿고 능력도 믿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처럼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유다 원로들이 예수님께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유다 원로들은 “선생님”이라고 하였는데 백부장은 “주님”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지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을 종으로 낮추는 것이니 더 겸손합니다.
유다 원로들은 주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만한 자격이 그에게 있다고 하지만
백부장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치 않아 원로들을 대신 보냈다고,
그러니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는 더더욱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이런 겸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믿음이고 참으로 감탄할 만한 겸손입니다.
우리의 믿음 부족과 겸손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그러나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