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혜안慧眼이라는 말이 있지요.
지혜의 눈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본다는 뜻도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못 보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본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어리석은 눈은 지혜의 눈이 보는 것을 못 보고,
반대로 지혜의 눈은 어리석은 눈이 못 보는 것을 봅니다.
첫째로 어리석은 눈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을 보지 못 보지만
지혜의 눈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을 꿰뚫어 봅니다.
투시하는 것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만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련을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단련을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을 못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보기 때문이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람의 행업일 뿐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에 하느님의 섭리가 있다고 ale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눈은 현재의 것밖에 보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눈은 현재의 것을 넘어 앞의 것까지 봅니다.
내다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환난을 당하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을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지금의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지금의 고통이 미래의 상급을 위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죽임 당함으로 교회가 끝장났다고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으로 교회가 더욱 융성할 것임을 내다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꿰뚫어보고 내다보는 사람들인데
오늘의 독서는 순교자들이 바로 이런 분들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의 순교 선열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정말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가진 것은 물론
자신의 목숨도 잃고 가족까지 다 잃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곧 위정자들은 이것으로
개인도 끝나고 교회도 끝장났다고 생각하였지만
우리 순교 선열들은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 대신 천국을 얻게 될 것이고,
자기의 죽음으로 교회가 이 세상에서 더욱 번성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만 명이 넘는 우리 순교 선열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주축이 되는 열심한 신자들이 죽음으로 교회는 끝장날 것 같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개신교까지 합치면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습니다.
떼르뚤리아노 교부의 말씀처럼 순교자들의 피가 신앙의 씨가 된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순교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의 죽음이 이 땅에 신앙을 꽃피우게 할 것임을 굳게 믿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 덕분에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선조들의 피가 우리의 편하고 나태한 신앙을 부끄럽게 합니다.
바치려 하지는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신앙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렇기에 순교자들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는 순교 선조들의 위대함을 기리면서
아울러 우리의 부족한 신앙을 되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