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다시피 어제 모든 성인의 날과 오늘 위령의 날은
죽어 우리를 떠난 영혼들에 관한 축일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같은 복음 곧 행복 선언을 듣습니다.
그런데 차이점도 있고 그래서 구분하여 축일을 지내는데
그것은 모든 성인은 천당에 가 주님을 직접 뵈옵는 영혼들인 데 비해
위령의 날에 기도하는 영혼들은 아직 천당에 가지 못한 영혼들,
그래서 아직 주님을 직접 뵙지 못한 영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성인보다는 아직 덜 행복한 영혼들이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위로가 더 필요한 영혼들입니다.
그래서일까 모든 성인의 날은 대축일로 지내고 대영광송도 하는 데 비해
위령의 날은 대축일로 지내지 않지만, 하루에 세 번 미사를 봉헌하고,
그것으로 모자란다고 생각되어서인지 11월 한 달을 위령성월로 보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영원한 행복 안으로 들어간 성인들은 현양을 할지언정
성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성인들의 전구를 우리가 청해야 하고,
아직 영원한 행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선 우리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요즘 우리 신자들은 위령기도를 전보다 덜 바칩니다.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훨씬 적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에게 효도보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큰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생미사가 자녀들을 위한 미사라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사랑이 본래 내리사랑의 측면이 있지만
아무튼 요즘 우리의 사랑이 치사랑보다 내리사랑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산 이들은 가까이 있고 눈에 보이는 데 비해
죽은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양 격언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가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떠났으니 하느님께 맡긴다는 우리의 믿음 말입니다.
여러 번 제가 말씀드렸듯이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어머니가 저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제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나 허무감에 매이지 말고
하느님께 어머니를 돌려보내 드려야 한다고 저의 믿음을 산뜻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것이 산뜻하게 ‘정 떼기’하고 ‘사랑 떼기’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통공의 교리와 믿음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산이든 죽은 이든 경계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산이와 죽은 이의 경계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진실하면 할수록 또 크면 클수록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의 청원기도 지향을 보면
죽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소수에 그치고 산 이들을 위한 기도가 대부분이며,
그러다가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모든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뭉뚱그려 바칩니다.
그러므로 위령의 날인 오늘 저는 두 가지를 다짐하며 기도합니다.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하고
말한 욥처럼 저도 하느님을 기어코 뵈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저를 위해 기도하고
위령기도 또한 더 잘하기로 다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저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