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우리 안에서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라고 바오로는 얘기하는데
이백 주년 성서에서는 ‘의지’ 대신에 ‘원의’라고 번역하고,
이전의 공동 번역 성서는 ‘할 마음’이라고, 영어는 ‘to desire’라고 번역합니다.
제가 다른 번역을 얘기하는 것은 ‘의지’보다는 ‘할 마음’이나
‘원의’로 번역함이 낫겠다는 제 생각을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는 ‘하느님의 호의’와 ‘우리의 원의’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의 원의를 일으키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실제로 원의를 일으킵니까?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우리는 주님을 따르려는 원의를 가지느냐는 말입니다.
살다가 보면 우리는 모든 호의를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누가 호의를 베풀어도 거절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 많지요.
누구의 호의는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호의는 싫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애초부터 부담스러운 사람은
하느님의 호의를 따를 생각이 아예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호의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꽤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하느님은 믿어도 예수는 싫은 사람이 그럴 겁니다.
싫고 좋음을 떠나서 무관심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그럴 겁니다.
어제 복음에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자기가 장가들어서 응하지 않고,
겨릿소를 부리러 가야 하기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르지 않는 더 큰 이유는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주님을 따를 때 요구되는 것들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자녀와 아내 곧 가족과 자신마저 미워하면서,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따르는 것이니
그 호의는 더더욱 따를 원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당신의 호의에 따라 주신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부모는 없고,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것은 호의도 선의도 아니듯이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그 호의에 따라 우리에게 베푸시기에 우리의 호불호가 바뀌어야 합니다.
장가가기보다 천국 가기를 더 좋아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호의에 우리의 원의를 맞추고 입맛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싫고 그래서 원치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