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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1174-1189)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1637):인노첸조 다 페트랄리아(Innocenzo da Patralia : 1591)

by 이종한요한 posted Dec 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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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 왕(1174-1189)

재료 : 모자이크

소재지 : 이태리 시칠리아, 팔레르모 몬테알레 대성당(Duomo di Monreale)


하느님을 신앙의 최고 대상으로 가르치던 가톨릭 교회는 진작부터 하느님을 왕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일의성이 아닌 다의적인 차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중세기 유럽 사회에 존재했던 세상에 왕들이란 사람들은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부담을 주고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지만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관점에서 모두가 받아 들인 존재였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을 삼위일체적인 존재로 설명하면서 성자인 하느님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셨다는 신앙교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할 때 세상이 말하는 왕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적 온기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와닿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표현되는 왕은 백성인 신자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왕이시니 같은 왕이란 칭호이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의 왕이시다. 이것은 성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며 당신은 이 세상 왕들과 다른 왕이심을 알리고 계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요한 18,36)



그런데 하느님이 왕이시라는 신앙은 구약 시대부터 강하게 표현되어 이스라엘 역사에서 막강한 지도자의 존재로 등장하는 다윗 왕의 위상을 바로 이스라엘에 왕권을 강화시키는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이사 9,6)



또한, 이스라엘 신앙의 하느님이 왕이시라는 믿음은 세상의 종말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의 모습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다니엘 7,13-14)


그러나 신약에 오면서 하느님의 성자께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신으로 등장하면서 세상의 왕으로서의 모습의 강조와 함께 이 왕이 바로 하느님의 신성을 지닌 분이심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면서 몬테알레 대성당의 모자이크인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대중화되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그리스도 왕이라는 표현에 있어 미흡한 면이 없지 않지만 지상에서 수직적 인간 관계의 왕에 대한 개념에 익숙한 중세인들에게 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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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세인들의 사고에 받아 들이기 쉬운 왕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성당에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시 수준으로서는 무리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그리스도의 모습이 중후한 중년의 모습 수염으로 위엄이 보이는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이것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이미지 강화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역사의 그리스도는 30대에 십자가의 죽음을 걲으신 젊은 분이었지 이런 모습이 실제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으나 이런 중후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접근하기 위한 인위적 변용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옷은 화려한 금색실로 수 놓인 인간의 상징인 붉은 색과 하느님의 상징인 푸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으나 이런 그리스도의 모습이 왕으로서 위엄과 권능을 표현하는데 조금도 어색치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의 왕과 하느님이라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게 배려하고 았다.


또한 작가는 예수님의 손의 동작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중요한 교리를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에 엄지와 약지를 잡은 손가락 셋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삼위일체의 심오한 교리를 표현하고 있다.


왼손엔 성서를 들고 계시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지켜야 할 인간적 의무를 제시하시면서 이것을 지커면 어떤
  위험에서도 인간을 지켜 주시리라는 하느님 약속의 표현이다. 그 당시 봉건시대로 왕의 지배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너무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있는 신앙의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의 실제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던 왕과의 관계에서 신앙을 표현했기에 신앙은 바로 중요한 삶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중세인들은 이 모자이크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자기들의 수준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왕이란 신앙고백을 하기가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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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1637)

작가 : 인노첸조 다 페트랄리아(Innocenzo da Patralia : 1591)

재료 : 목재

소재지: 이태리 아씨시 산 다미아노 수도원


중세기에 당연시하던 그리스도 왕에 대한 신심이 신앙적 사색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셨던 성탄 신앙이 탁발 수도자들을 통해 교회에 전파되면서 하느님의 신성을 지닌 예수님 못지 않게 인간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인간 예수에게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성서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난의 고통을 겪으신 예수에 대해 관심이 쏠리면서 새로운 이 세상의 왕과는 전혀 다른 왕의 모습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에게 너무도 친근한 모습이지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은 과거 왕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 보다 훨씬 더 예수의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과거와 같은 왕관을 쓰고 위엄을 갖춘 예수님의 모습은 새로 시작된 교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위상을 격상시키는데도 큰 도움이 되어 의도적으로 이런 왕의 모습을 강조했으나 이것은 정교 일치라는
  잘못을 불러 일으켰다. 


중세기에 교황이 왕들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교회 타락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고 교황과 왕들의 힘겨루기에서 패배는 아비뇽의 유수라는 1309년에서 1378년까지 69년 간 7명의 교황이 프랑스 왕 필립 2세의 지배 아래 있는 프랑스 아비뇽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이런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서 교회는 서서이 세상 권력과는 전혀 무관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시기 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그리스도 왕에 대한 건강한 신심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런 신심의 표현은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가시관을 쓰신 비참하고 고통스런 왕에 대한 이해를 키우게 되었다.


4복음서에서는 여러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면서도 동일한 것은 그분이 겪으신 고통과 불안과 절망이 대단했는데, 그중에 첫 번은 바로 성부께로부터 자기가 버림받지 않았느냐는 원조적인 불안이었다.


“오후 세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저것봐! 엘리야를 부르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신 다음, 갈대에 꽃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마르 15,34-37)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말을 너무도 생각없이 되뇌이는데 습관이 되어 있으나 예수님은 참으로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 너무 비참한 순간을 겪으셨는데, 삶의 정황에서 우리가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될 때 이때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절망의 순간에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되며 마음의 평정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중세기에 이 복음에 눈길을 돌리게 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신앙에 중심에 두게 되면서 ‘가시관을 쓰신 왕 예수’에 대한 신심이 자라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프란치스코회 수사였던 어떤 시칠리아 수도자의 작품이었다. 이 작가는 비천한 집안에 태어난 수도자로서 수도생활에 항상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에 대한 것을 작품화하게 되었다. 작품 재료 역시 값비싼 대리석이 아닌 수도원에 지천으로 널리 나무를 재료로 조각했다.


작가는 예술가의 눈으로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프란치스칸 수도자로서 수행의 관점에서 제작했기에 작품을 제작할 때 마다 이웃 사람이나 수도원에 맡겼다. 이 작품 역시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수도원에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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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표정들은 한 작품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묵주기도에서 바치는 기쁨과 고통과 영광의 신비라 드러나고 있어 응시하는 것 만으로 큰 신앙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작가는 프란치스칸 작가로서 예술적 작품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신앙의 순수함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수행의 과정에서 영근것이기에 어떤 작품에서도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가시관을 쓰시고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예수님의 왕권을 표현하고 있다. 인노첸죠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의 십자가 신학에 대단한 감동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가시관을 쓰고 계신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적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고 작품을 통해 이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신앙적 열정이 바로 작가의 작품을 통해 표시되고 있다.


예수님의 인간의 사랑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통한 사람을 표현했는데 인간 삶의 여정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은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한다면 그 상대를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위대성은 인간을 위한 사랑을 극심한 고통으로 표현하신 것이고 이것은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자기가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심에도 고통이란 방법을 선택하신 것은 인간에의 큰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자기 스스로는 고통을 벗어날 길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고통을 받아 들여야 하는 인간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시는 주님 사람의 완벽한 표현이 바로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가시관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이시다.


앞에 본 몬테알레 대성당의 왕은 수준이 낮은 왕의 모습이라기 보단 역시 십자가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왕의 모습이었으나 이 십자가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 왕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을 모시고 있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은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과 현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이 소박한 십자가가 모셔진 자체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는 프란치스칸 삶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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