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오늘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구원하러 하늘에서 첫 번째 내려오심의 재현이며 그 연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려오시건, 찾아오시건, 다가오시건, 오시는 분이십니다.
붙박이 당신 자리에 있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당신 계실 곳입니다.
이는 자식이 있는 곳이 엄마가 있는 곳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오시길 청하지 않아도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 찾아오시고 스스로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우리가 청하지 않았으니 오시든 말든 하시라고 해서 되겠습니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마중 나가야 하고,
오시는 사랑에 우리 사랑도 마중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라고 촉구하고,
복음의 백인대장은 주님을 찾아갑니다.
이는 겸손과 사랑으로 오신 주님을 겸손과 사랑으로 마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겸손하게 오시는 주님을 겸손하게 마중해야 할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겸손하게 찾아오시겠다는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기에
주님의 오심을 마다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거절이 아니라 겸손한 사양입니다.
이것이 겸손과 겸손의 만남이라면
이제 사랑과 사랑이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낮추시는 사랑이라면
백인대장의 사랑은 우러러 뵙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것 자체가 사랑이지만
낮춰서 오시는 것이 더더욱 사랑이며
낮디낮은 우리 인간에 맞춘 사랑입니다.
엄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맞춰 자신을 낮추고 굽히듯
주님께서는 엄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 인간에게 맞춰 더 낮추시고 굽히십니다.
낮추시는 이런 주님의 사랑에 맞갖은 우리 인간의 사랑이
경외하는 사랑인데 백인대장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경외란 공경과 두려움이 같이 있는 마음 자세지요
아홉 유대인 나병환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낮추시는 주님 사랑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데 비해 백인대장은 합당한 경외심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백인대장에게서 자극을 제대로 받고 배운다면
겸손과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그저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우리도 달 마중 가듯 겸손과 사랑으로 마중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마중하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 이상의 사랑임을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