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주님을 알자고 하고, 알도록 힘쓰자고 하는 호세아의 호소가
다른 날 같지 않은 간절함으로 제 마음에 스며듭니다.
저는 지난 달 간절곶이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만큼 그곳에서 빌거나 호소하면
들어야 할 사람의 귀전에 다 들릴 것 같았는데,
오늘 호세아는 그 간절곶에서 호소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모르면,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알려고 들지 않았으면
호세아는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있고
또 우리 중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아는 것이 다 똑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이 때문이겠지요?
소문으로 아는 것이 있고,
체험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있고,
사랑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소문과 지식으로 아는 것은 그 정보만 내 안에 들어와 있게 되는데
체험과 사랑으로 아는 것은 그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아는 것은 그 존재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중에서도 그가 무엇을 진정 좋아하는지,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모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이런 면에서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그래서 하느님을 전혀 사랑치 않는 작자입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잘 내는 걸
하느님께서 제일 좋아하신다고 생각하는 위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희생제물도 번제물도 십일조도 단식도 아닙니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애로다.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바리사이는 또한 하느님께서 무엇을 가장 싫어하시는지 모릅니다.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자기가 뭘 잘못하는지 모르고 잘 낫다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자기가 잘 낫다는 생각에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업신여기는 것’은 ‘없이 여기는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돈 없는 사람’을 ‘없는 사람’처럼 여기는 겁니다.
돈이 없는 것이지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닌데.
분명 존재가 앞에 있는데도 없는 거처럼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업신여기는 사람은 사람만 업신여기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랑하느라 사실은 하느님도 그에게는 없습니다.
비유의 바리사이처럼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만
사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나아가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일 겁니다.
주님을 알자고 하고, 알도록 힘쓰자고 하는 호세아의 호소가
다른 날 같지 않은 간절함으로 제 마음에 스며듭니다.
저는 지난 달 간절곶이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만큼 그곳에서 빌거나 호소하면
들어야 할 사람의 귀전에 다 들릴 것 같았는데,
오늘 호세아는 그 간절곶에서 호소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모르면,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알려고 들지 않았으면
호세아는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있고
또 우리 중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아는 것이 다 똑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이 때문이겠지요?
소문으로 아는 것이 있고,
체험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있고,
사랑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소문과 지식으로 아는 것은 그 정보만 내 안에 들어와 있게 되는데
체험과 사랑으로 아는 것은 그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아는 것은 그 존재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중에서도 그가 무엇을 진정 좋아하는지,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모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이런 면에서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그래서 하느님을 전혀 사랑치 않는 작자입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잘 내는 걸
하느님께서 제일 좋아하신다고 생각하는 위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희생제물도 번제물도 십일조도 단식도 아닙니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애로다.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바리사이는 또한 하느님께서 무엇을 가장 싫어하시는지 모릅니다.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자기가 뭘 잘못하는지 모르고 잘 낫다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자기가 잘 낫다는 생각에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업신여기는 것’은 ‘없이 여기는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돈 없는 사람’을 ‘없는 사람’처럼 여기는 겁니다.
돈이 없는 것이지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닌데.
분명 존재가 앞에 있는데도 없는 거처럼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업신여기는 사람은 사람만 업신여기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랑하느라 사실은 하느님도 그에게는 없습니다.
비유의 바리사이처럼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만
사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나아가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일 겁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나날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