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오늘 대림 제2주일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데 그 길을 마련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서 주님께서 길이 없어 못 오시나,
길을 내지 못해서 못 오시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내실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길을 우리가 내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의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주님의 길을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마련하시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은 내가 마련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우리가 마련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먼저 나에게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마련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마련의 제일 적극적인 반대는 거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마련하기는커녕
길에 바리케이드를 치거나 문을 닫아걸거나 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주님이 내게 오시는 것이
나를 파괴하거나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에 더러운 영들이 주로 보인 태도이고,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Privacy 고수 태도입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께서 게라사라는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게라사 마을 입구에서 주님을 막고서는 나를 괴롭히려고 오셨냐고 따지고,
떠나달라고 애걸하는데 통하지 않자 돼지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다음은 무관심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주님이 오시건 말건 상관없고 그래서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을 일컬어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느님 나라보다 이 세상일에 관심이 더 많고 근심 걱정도 많습니다.
요즘 같으면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 때문에 대림절은 저리 밀려난 실정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오히려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야겠지요.
다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단독 세대라면 나에게 오시는 주님만 맞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족과 같이 살거나 공동체로 생활한다면 같이 맞이해야겠지요.
이 대림절에 이런 의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주님을 맞이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혼자서 대림절을 보내지 않고,
공동체가 같이 주님을 맞이하고 대림절을 보내려는 의식과 노력 말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혼자 기도하고 같이 기도하지 않는 집이 많고
자녀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가정은 더 많습니다.
나 외에 가족이 신자가 아니거나 갈등이 많아 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다 신자인데도 같이 해야겠다는 의식이 없고
그래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이겠지요.
대림절 초를 마련하여 그 불을 하나하나 밝히며 주님 오심을
같이 깨어 기다리고 준비하며 기도하는 우리 집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