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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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엘리야의 일을 한 사람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성경을 읽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율법 학자들이 늘 그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군중 사이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도 “저
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요한 4.25) 하고 말했고, 사람들이 요한에게 ‘당신은 엘리야요? 아니면 그 예언자요?’(요한 1,21 참조) 하고 물은 것입니다 .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나 엘리야에 관한 이런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그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일어난 지금의 오심과 앞으로 있을 재림이 그것입니다. 바오
로는 이에 대해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티토 2,11-12) 하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오심을 잘 보고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으십시오. 그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 라고 합니다.
예언자들도 두 번의 오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엘리야가 선구자로 올 것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오심의 선구자는 요한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고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그가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두 번째 오심의 선구자일 것이듯이, 요한은 첫 번째 오심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을 혼동하고 사람들을 나쁜 길로 이끄는 율법 학자들은 두 번째 오심에 대해서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이자가 그리스도라면, 엘리야가 먼저 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시어,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셨습니다"(1요한 4,9). 아들을 통해 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한 부유한 왕이 아리따운 딸과 함께 살다가, 가난한 사람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가난한 집의 온 식구도 결과적으로 신분이 높아지고 고귀해질 것입니다. 영성의 대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의 신분이 상승되고 고귀해졌다. 실로 우리는 기뻐 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형제인 그리스도가 자신의 능력으로 천사들의 합창대를 넘어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이 대가의 말은 실로 옳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떠받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나에게 부유한 천구가 있다고 한들,내가 가난하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지혜로운 벗이 있다고 한들, 내가 어리석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296)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1-6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원효 연구 전문가인 은정희는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중관(中觀) 사상과 유식(唯識) 사상의 지양 종합으로 보았다고 갈파했다. <대승기신론>의 기본 구조 중 일심이문(一心二門) 중에서 중관학파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심생멸문(心生i滅門)을 강조하지
만, 일심에로 이문(二門)이 종합 지양됨을 밝힘으로써 성과 속을 독립된 별개의 실제로 보려는 위험을 비관적으로 극복하고 종합 지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효와 야스퍼스 사상의 비교 연구에 일생을 바친 신옥희는 <일심과 실존>이라는 책에서 원효의 일심을 자세하게 논하고,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제인 일심과 원효의 신앙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신론>에서 블신론(佛身論)은 일심진여(一心眞如)의 체(體), 상(相), 용(用)의 삼대(三大)를 논하는 부분에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전개되고 있는 불신론(佛身論)은 대승(大乘)으로서의 일심의 실천적 . 구원론적 측면, 즉 중생의 능력에 따라 그들에게 작용하여 그들을 각(覺)의 해탈로 이끌어주는 일심의 신비로운 정용(淨用)을 보여주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기신론>의 사상을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는 원효에게서 일심은 각(覺)의 본체로서 평등무이(平等無二)의 진여 자체일 뿐 아니라 생동하는 각(覺)의 주체로서, 생멸의 세계로 전락한 중생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진여의 훈습을 일으켜 그의 본래의 모습인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신비스러운 힘으로서 작용한다.”(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