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6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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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
나를 위해 증언하여라
‘우리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세상이 혐오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는 것을 보고 어떻게 사람들이 믿음으로 오겠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종류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를 파괴하는 마귀들 같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 사는 곳에서 몰아내야 할 돌림병이나 재앙 취급 하지 않을까요? 친족끼리 싸우는 피로 물든 세상을 사람들이 보게 되지 않을까요? 비록 많은 갈등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그들의 집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단지 12명이 아니라 아주 많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배우지 못한 일자 무식쟁이’가 아니라, 아주 지혜롭고 수사학에 능통한 달변가라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의 선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겠습니까? 우리가 엄청난 재산과 군대를 거느린 임금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것들이 평화의 나라를 선포하는데 더 효과적일까요? 왜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안전을 아랑곳 않을 때, 우
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걸까요?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과연 실제적인 가치가 있는지 따져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 않고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순종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스승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 덕분이었습니다.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5)라고 하십니다. 그런 다음 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몰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겪음으로써 사람들을 꾸짖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결코 작은 경고가 아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어떤 사람이 천 년을 살면서 삶에게 “왜 사는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살기 위해서 산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자신의 터에서 살고, 스스로에게서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유 없이 사는 것은 스스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엑카르트는 이유 없이 사는 삶을 다른 자리에서도 되풀이해서 설명한다. 그는 이유 없이 사는 삶이라는 주제로 아래의 대화를 상상하여 말한다.
“당신은 왜 하느님을 사랑합니까?’ “잘은 모르지만 … 하느님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진리를 사랑합니까”” “진리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선을 사랑합니까?” “선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삽니까?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사는 게 즐겁습니다.”(303)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4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15-2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어느 날 아침 학교 가기 전에 루치아는 잠깐 히야친따에게 들렸는데 그 날 아침따라 안색이 무척 나빴다.
“너 많이 아프구나."
“어젯밤은 너무 심해서 일 분도 잘 수가 없었어 . 게다가 난 몸을 뒤척 이지 않는 희생을 바치려 했었어."
그리고 혼자일 때는 자리에서 내려와 천사의 기도를 바친다는 것도 루치아에게 이야기했다.
“정말 속상해. 난 이제 방바닥에 엎드릴 수가 없어. 굽히려고 하면 넘어져 버려. 할 수 없이 꿇어서 기도해."
그 후 루치아는 우렘의 페레이라 본당 신부를 만났을 때 히야친따의 사정을 알려 드렸다. 친절한 신부는 루치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주
었다.
“이제부터 히야친따는 일어나서는 안 되고 만일 기도해서 피로하지 않거든 이불 속에서 기도해라."
이 전갈은 곧 전해졌는데 병자는 반문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흐뭇해하실까?"
“흐뭇해하시고 말고, 예수님은 우리가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고 계셔."
“그래. 그럼 그렇게 해야지 뭐."
이것 또한 하나의 희생이요 그 어떠한 희생보다 뛰어난 순종의 희생인 것이다.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