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불행을 아랑곳하지 않는 행복한 사람의 불행.
루카복음은 부자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 불행한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오늘 거지 라자로와 부자의 얘기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저승에 간 부자는 자기처럼 자기 형제들이 저승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형제들에게 보내 회개하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루카복음사가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집니다.
부자는 부유함 그 자체로 죄를 지은 것이고,
회개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부유함 그 자체를 회개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데 정말 그런 건가요?
루카복음에는 그런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좋은 것을 다 받아
천국에 가지 못하고 저승에 가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받아 누려
저 세상에서는 더 받을 것이 없고 고초를 겪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루카복음은 의도적으로 거지 나자로의 이름은 부르는데 비해
부자의 이름은 부르지 않고 그저 부자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에서 살 때는 어땠습니까?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까?
부자는 유명했고 거지는 무명이었을 것입니다.
무명용사, 무명 순교자처럼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명이라고 정말 이름이 없었던 건가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른 것이고,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사라져 불러주지 않은 거지요.
사실 이 모 회장의 이름은 알고 싶지 않아도 하도 유명하기에 알고 있지만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의 이름은 모르기에 그저 노숙자라고 우리가 부르고,
노숙자가 이 모 회장의 이름은 알아도 이 회장이 노숙자 이름은 모르지요.
그래서 노숙자에 대해 성이 ‘노’이고, 이름은 ‘숙자’라고 농담을 합니다.
그러니까 루카복음은 이 세상에서 유명한 부자는 천국에서 이름이 없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불러주지 않은 가난한 이들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몸소 불러주신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으며,
오늘의 본기도도 “하느님, 탐욕스러운 부자를 멀리하시고
가난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며”라고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의 죄, 부자가 회개해야 할 죄는 부유함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함으로 천국에서 부유함을 찾지 않은 것이 그 하나요,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을 모르고 그래서 부르지 않은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오늘 아모스서의 표현을 빌리면 부자란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가난한 이웃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국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부자는 자기의 부유함에 도취하여 가난한 이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천국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문밖 가난한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산 사람은
건널 수 없는 심연 때문에 천국에 있는 가난한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 세상 문의 안과 밖은 깊은 심연을 사이에 둔 지옥과 천국이며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웃에게 닫힌 문은 천국의 닫힌 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 이 모 회장만큼 없다고 부자 아니고 죄인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천국을 아랑곳하며 살고, 이웃을 아랑곳하며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