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9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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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 소식
우리 구원자께서는 회당에서 유대인들 가운데 이 예언을 읽으신 다음, 두루마리를 덮고는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렇습니다, 그분은 오랜 세월 악령에 사로잡혀 마귀의 노예로 묶여 있던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라고 만민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주겠다”(마태 11,28).
육신의 눈이 망가진 이에게는 볼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써 눈먼 이에게 빛을 주시고, 먼 옛날부터 마음으로 진리에 눈먼 자들에게는 참 종교의 빛으로 진리를 볼 수 있게 하셨지요. 우리가 들은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창시자요
인도자가 되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을 한 예언자는 그분 사후에 제자들이 그분의 일을 계속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려 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펑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로마 10,15).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가는 곳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에 관한 성스런 가르침으로 기득 채웠으니, 어떻게 그들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에우세비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의식이 하나의 방법 내지는 수련 방법에 얽매이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분은 어떠한 방법에도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어떤 하나의 공경 방법이나 이 방법 내지 저 방법에 갇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이 방법 내지 저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분에게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방법을 받아들인 것이지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 수많은 공경 방법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긴의자 밑으로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아무리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제아무리 탄식하게 할지라도, 그런 방법이 하느님인 것은 아닙니다.
엑카르트는 요령을 통해 무아경에 이르는 것과 하느님 경험을 혼동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바보”라고 부른다.
참회 방법과 외적 수련 방법을 수없이 만들어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이기적인 자아를 굳건히 붙잡는 자들, 신적인 진리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한 자들은 겉으로는 거룩하다고 일컬어지겠지만, 속으로는 바보와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적인 진리의 실질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더 나은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그들은 크게 진보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나 다름없습니다. 신적인 진리를 전혀 모르니 말입니다.(310)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2.3요한 / 요한 1-4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빌라 노바 드 우렘의 병원
1919년 봄도 지난 한여름에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히야친따의 병세는 조금도 좋아지는 기세가 없었다. 의사는 입원하라고 권했다.
입원해야 한다는 결정을 들은 히야친따는 드디어 가족들과의 마지막 작별의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슬퍼했다. 루치아와의 작별은 한층 더 괴로운 것이었다. 루치아의 잦은 방문으로 살을 저미는 것 같은 병고도 참아 낼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 혼자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다정다감한 히야친따에게 있어서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고바 다 이리아의 귀부인께서 프란치스코의 병상을 방문하셨을 때도 히야친따는 사촌 언니의 사정이 마음에 걸렸는데 지금 다시 그 일을 되새기면서....루치아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입원할 때 루치아도 함께 가느냐고 여쭈었더니 아니라고 귀부인은 말씀하셨어 . 난 그게 제일 괴로워 • 엄마가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 준 뒤에는 혼자 있어야 되는데 ...... 어떻게 하면 좋지?"
하고 말한 뒤 쓸쓸한 모습으로 잠깐 묵묵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언니가 같이 있을 수만 었다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언니가 같이 갈 수 없다는 거야 ! 병원이란 곳은 아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집이겠지 . 거기서 나 혼자 고통을 겪어야 해 . 아이, 싫어 ......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하느님을 위해 교황님을 위해 죄인들을 위해 고통을 받겠어."
부모님이 입원비를 마련해 주신 덕택으로 빌라 노바 드 우렘의 성 아우구스티노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1919년 7월, 8월 두 달을 그 병원에서 지냈다.
어머니가 맨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아 ! 루치아가 보고 싶어요" 하고 대답했다.
올린삐야는 두번째 방문을 가게 되었을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다 젖혀 놓고 루치아를 데리고 갔다. 히야친따는 오랫동안 루치아를 껴안았으며 어머니가 시내로 일보러 간 동안 끝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어머니가 그밖에 원하는 것은 없느냐고하자,
“다음에 오실 때도 루치아를 데리고 와 주세요" 하고 섭섭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눈으로 대답했다.(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