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어제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분의 자기무화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자기무화의 사랑을 그가 가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욕과 고통으로 그를 시험해보면 알 수 있다고.
자기가 없는 사랑, 또는 자기를 죽이는 사랑.
이 얼마나 우리가 꿈꾸는 사랑입니까?
그런데 이 사랑에 우리가 이르지 못함은
모욕과 고통을 두려워하고 더 나아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욕과 고통을 두려워함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의 이 여정을 출발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모욕과 고통이 두려워 출발 자체를 못합니다.
실상 자기가 죽는 이 모욕과 고통의 여정은 두렵습니다.
저는 순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어느 한 순간, 예를 들어서 사형 선고를 받고 바로 총살에 처해진다면,
다시 말해서 한 순간에 딱 끝나는 것이라면
순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순교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기 전에 받아야 할 그 고문과 그 모욕입니다.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집어넣으며,
불 인두로 넓적다리를 지지는 등의 고문을 받게 될 것을 생각을 하면,
그리고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래 지속될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것을 받아낼 용기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통을 받게 될 줄 알면서도
자기무화의 여정을 떠나는 것은 대단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이 여정을 떠났을 뿐 아니라
그 모든 모욕과 고통을 끝까지 견디어내는 사랑은 더 대단합니다.
제 생각에 인내는 용기보다 더 위대합니다.
한 순간 용기를 낼 수 있지만
그걸 끝까지 견디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고통과 모욕을 택할 수 있지만
인내가 없으면 그것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모욕이 그 어떤 것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의 경우지요.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그런 구차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욕과 수치를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살아서 죽는 겁니다.
과하지욕跨下之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한 나라 때 어려운 중에 병법을 익힌 한신이 동네 깡패들로부터
살고 싶으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는 치욕을 당하지만,
그 치욕을 견디어 냄으로써 마침내 큰 장수로 성공했다는 얘기지요.
자기의 큰 꿈을 위해 이렇게 소아小我를 죽이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것은 더 대단합니다.
진정한 자기 무화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모욕에 모욕당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 자존감이 대단하고 사랑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건 남에 대한 사랑이건
사랑하는 만큼 고통과 모욕을 감수하고 견딜 수 있다고.
고통과 모욕을 견디는 그 만큼 자기 무화의 사랑이라고.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어제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분의 자기무화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자기무화의 사랑을 그가 가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욕과 고통으로 그를 시험해보면 알 수 있다고.
자기가 없는 사랑, 또는 자기를 죽이는 사랑.
이 얼마나 우리가 꿈꾸는 사랑입니까?
그런데 이 사랑에 우리가 이르지 못함은
모욕과 고통을 두려워하고 더 나아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욕과 고통을 두려워함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의 이 여정을 출발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모욕과 고통이 두려워 출발 자체를 못합니다.
실상 자기가 죽는 이 모욕과 고통의 여정은 두렵습니다.
저는 순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어느 한 순간, 예를 들어서 사형 선고를 받고 바로 총살에 처해진다면,
다시 말해서 한 순간에 딱 끝나는 것이라면
순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순교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기 전에 받아야 할 그 고문과 그 모욕입니다.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집어넣으며,
불 인두로 넓적다리를 지지는 등의 고문을 받게 될 것을 생각을 하면,
그리고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래 지속될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것을 받아낼 용기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통을 받게 될 줄 알면서도
자기무화의 여정을 떠나는 것은 대단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이 여정을 떠났을 뿐 아니라
그 모든 모욕과 고통을 끝까지 견디어내는 사랑은 더 대단합니다.
제 생각에 인내는 용기보다 더 위대합니다.
한 순간 용기를 낼 수 있지만
그걸 끝까지 견디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고통과 모욕을 택할 수 있지만
인내가 없으면 그것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모욕이 그 어떤 것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의 경우지요.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그런 구차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욕과 수치를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살아서 죽는 겁니다.
과하지욕跨下之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한 나라 때 어려운 중에 병법을 익힌 한신이 동네 깡패들로부터
살고 싶으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는 치욕을 당하지만,
그 치욕을 견디어 냄으로써 마침내 큰 장수로 성공했다는 얘기지요.
자기의 큰 꿈을 위해 이렇게 소아小我를 죽이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것은 더 대단합니다.
진정한 자기 무화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모욕에 모욕당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 자존감이 대단하고 사랑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건 남에 대한 사랑이건
사랑하는 만큼 고통과 모욕을 감수하고 견딜 수 있다고.
고통과 모욕을 견디는 그 만큼 자기 무화의 사랑이라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묵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