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번 얘기 드린 적이 있는데 무술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실은 이제 그 세계를 청산하고 세례받고 싶다며 찾아오신 분입니다.
얘기 중에 정신이 맑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욕심이 들어오게 되면
점을 칠 수가 없어서 욕심을 끊임없이 비워내는 수양을 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무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신무 곧 신내림을 받은 무당은 단골을 위해 굿을 할 때
먼저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해야 접신을 할 수 있고
접신(接神)의 표시로 작두까지 탈 수 있다고 합니다.
무당도 보통 때는 한 인간이고 가정이 있으며 그래서 욕망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비워내지 못하고 그래서 접신을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요.
사실 무당이 작두 타기 전에 강렬한 음악과 격렬한 춤을 추며 굿을 하는 것도
그런 음악과 춤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아무리 무술인이고 무당일지라도 이러해야 마땅한데
그런데 이번에 우리나라를 뒤집어놓은 사람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고,
무술을 자기들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았고 그래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술인뿐 아니라 목사라는 인간도 한몫하고 있는데
다 자기들 욕망을 실현한다는 면에서 한통속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목사라고 할 수도 없는 욕망의 개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우리의 대사제는 욕망의 개들과 당연히 다르십니다.
욕망의 개들은 우리를 자기들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음으로써 공멸케 하지만
우리 대사제는 당신을 통해 우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신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휩쓸리지 않는다는,
또는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런 우리의 대사제를 대신한다고 하는 저를 성찰하고 반성합니다.
나도 욕망의 개는 아닌지.
나는 진정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인도자이고 중개자인지.
사람들을 내 욕망의 도구로 삼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 않고 내게로 오게 하는 사람은 아닌지.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주님의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에 대해 자문하고 반성해야겠습니다.
나도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요 인도자라는 인식이 있는지.
거룩하고 순결한 인도자이고 욕망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 중개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