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오늘 창세기는 고통의 기원과 이유에 관해서 얘기해주는데
죄의 벌로서 고통이 주어짐을,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셨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점입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고통이란 자기 업보(業報)라는 말입니다.
선업을 쌓았으면 고통이 없을 텐데 악업을 쌓았기에 고통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틀린 말이 아니고 창세기를 믿는 그리스도교 또한 죄지었기에 고통을 받는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셨다고도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고통이 업보라면 그리스도교의 고통은 벌인데
여러분은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습니까?
제 생각에 내 죗값이라고만 받아들인다면 불교의 업보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상관없이 내 죗값이라고만 받아들인다면
불교의 업보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죄의 벌을 받았는지
그 모범을 본받아 벌을 받더라도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생애 말년에 다윗은 인구조사와 병력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일생 군마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으면서도
자기 백성과 군마의 조사를 통해 자기가 이룬 태평성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쨌거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벌을 받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님께서 세 가지 벌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하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그래서 흑사병이 창궐하는 벌이 내려졌을 때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윗을 본받아 하느님께서 벌하시게 해야지
자기가 자기 죄를 벌하거나,
인간이 자기 죄를 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인 우리의 죄는 하느님 뜻과 계명을 어긴 죄이고,
고통도 하느님께서 벌로서 주신 고통이라고 믿기에
우리는 죄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고통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며
그렇기에 죄도 벌도 고통도 성사적인 죄와 벌과 고통이 됩니다.
이것이 죄를 짓고 벌을 피하여 숨음으로써
하느님과 단절된 아담과 하와와 다른 점이고,
다윗처럼 죄를 지어도 하느님을 만나고,
벌을 받아도 하느님 사랑을 만나며,
고통 중에서 더더욱 하느님을 찾는 신앙인다운 것임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