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에제키엘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아무리 악인이어도 죽는 것을 바라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인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요즘 제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대지 않겠지만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불안케 하고 불행하게 하는 자들이고,
그들만 없으면 많은 이가 행복할 것이고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회개하고 살게 되기를 바라지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데
니네베인들이 회개하여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요나처럼 저도 그들이 회개해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죽게 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고
다만 내 앞에서 사라져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데 그의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악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압도적이기에
그 죄와 악이 아무리 커도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크지 않으면 우리는 미워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너무나도 작으면 도리어 악에 압도되어
악에서 그를 빼내지 못하고 악과 함께 그마저 없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제자라면 우리 의가 바리사이의 의를 능가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바리사이의 의는 단죄하는 의에 불과하고 죄인을 용서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이기는 해도 살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바리사이의 의는 율법의 의를 지키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의는 단죄하는 의일 뿐 아니라 최소한의 사랑입니다.
최소한의 사랑은, 누굴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런 죄,
곧 살인과 같은 큰 죄만은 짓지 말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최대한의 사랑은 남에게는 성내거나 욕하는
그런 작은 죄조차도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내게는 원수가 될 정도로 너무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할 때 가능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고,
인간적인 힘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데
하느님께서 이런 사랑하기를 원하시니 하려는 마음도 먹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 그 힘으로 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죄를 짓고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 예물 드리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갈 때는 반드시 화해하고 난 뒤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에게 갈 때 동생 돈 떼어먹고
그 돈으로 부모에게 갈비 사서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기 전에 해야 할 화해는
내가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만이 아니라
내게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내게 너무 큰 죄를 지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다시 말해서 그가 용서를 청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하느님 사랑 때문에(Propter amorem Dei) 하기 싫은 사랑도 하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못 할 사랑도 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