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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오르지오와 용(George and the Dragon 1605) :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

by 이종한요한 posted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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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 제오르지오와 용 (George and the Dragon (Rubens) 1605)

작가 :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

크기 : 켄버스 유채 309 cm × 257 cm 

소재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Madrid)



몸담은 우리나라가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으며 어디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방향을 잡기 어려운 처지이다. 단군 이래 반도 국가인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련을 많이 겪어야 했다. 대륙 쪽에선 중국으로부터 바다 쪽에선 일본으로부터 숱한 시련을 많이 겪어야 했고 내부적으로도 지도자의 무능에 의해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오늘의 현실만큼 국민이 잘못 선택한 지도자 하나 때문에 국가가 쑥대밭이 된 적은 없다.



국론의 분열이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악의 축의 중요 세력이 일부 종교 세력 지도자가 주동이 된 비호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다.



국가 뿐 아니라 어디에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서로 다른 의견들이 공존할 수도 대립할 수도 있으나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선과 악이 격렬히 대립하는데 악의 힘이 너무도 교활하고 강하다는 데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두 명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람이 이 악의 선두에서 부채질하면서 많은 교직자들을 중심으로 피라미드 조직으로 오만 악행으로 무지한 신자들을 광기에 몰아넣아 국가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가 토요일 광화문과 여의도 광장에서 나와 지휘하고 있는 이 악의 세력들이 만든 여러 사건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조작이나 편법을 사용해서 오만가지 음해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흐리게 만듬으로 세상에 악이 더 강한 것으로 체념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악의 힘을 굳세게 믿으면서 어안이 벙벙할 수치스러운 광란을 벌리고 있다.

정의와 진실을 보호하고 찾는 것을 목표로 한 검찰 조직이 몇몇의 악한 법조인의 조작으로  법이 악을 조장하고 키우는 악마의 세력에 둔갑해 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의 노력만으로 도저히 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시편 저자가 했던 다음의 기도가 오늘 만큼 절박한 희망으로 닥아 온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와 힘이 되시어 어려울 때마다 늘 도우셨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 든다 해도.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세상에 놀라운 일을 이루신 그분의 업적을! 그분께서 세상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꺾고 창을 부러뜨리시며 병거를 불에 살라 버리시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야곱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산성이시네.” (시편 46,2-3 ; 9-10; 12)



그러나 다행스럽고 놀랍게도 이런 처지의 우리에게 희망의 확신을 전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의 처지와 너무도 비슷한 악이 선을 삼키는 것 같이 보이는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악이 패배하고 선의 역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하고 있기에 이 망연자실한 현실에서 좌절하기 보다 승리의 봄이 가까이 왔음을 믿고 용기를 낼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런 경우에 개입해서 본때를 보여 준다면 얼마나 통쾌하겠느냐는 본능적 염원이 생기게 된다. 우리 주위에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악에 기운 종교인들이나 국가 지도자들, 법을 악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으나 악의 힘이 너무 강해서 이들이 힘이 너무 무력한 것같이 느껴지는 답답한 현실이다. 

이런 혼란스럽고 답답한 현실에서 우리에게 악의 괴멸과 선의 승리를 믿을 수 있는 성화 한점을 보는 것으로 위안을 얻고자 한다.



신약 성서의 마지막 부분인 묵시록에선 바로 이런 선과 악의 투쟁에서 초반전에는 악이 더 득세한 것으로 나타나나 뒷 부분에는 하느님의 힘이 개입해서 악의 세력이 꺾인다는 희망을 주고 있는데 사실 이런 묵시록적인 승리가 오늘 우리 사회의 악행을 보면서 더 그리워진다.



묵시록 12장은 이것을 너무도 잘 전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 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 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 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 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묵시 12,1-5)



이 작품의 작가인 피터 폴 루벤스는 일반 예술가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네델란드로 와서 당시 대단한 무역항으로 번성하고 있던 안드와프에서 활동하면서 참으로 풍부한 재능과, 인근 예술 대국인 로마와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대단한 작가들로부터 수업을 받아 쌓은 경력과, 무엇보다 그의 외교관 다운 유연한 성격과 사교적 성 때문에 많은 고객들을 확보하면서 작가로서의 그의 기량은 천정 부지로 치솟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경쾌하고 장엄한 구도를 가짐으로서 큰 작품을 걸고자 하는 고객들에게 대단한 환경을 받으면서 특히 대성당과 같은 곳에 그의 작품이 남게 되고 오늘날에도 여러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은 미술관 수준의 척도가 되면서 많은 관람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역시 당시 게오르그를 주보로 모신 성당을 위해 제작했다가 의뢰인이 대금 지불을 잠시 망설이는 사이 당시 네델란드 지배자였던 스페인의 필립페 2세 왕이 구입해서 스페인 미술관으로 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성 게오르그라는 303년 로마 박해 시대에 로마 황실의 근위 대장으로 크리스챤이 되어 지내다 박해 시대 때 순교한 성인으로 전해진다. 그에 대한 신심은 6세기부터 퍼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적 관심과 공경의 대상이 되자 그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사실처럼 첨가되기 시작했다.



마치 심청이나 성춘향이의 이야기가 실화 이기 이전 우리 민족들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이 성인의 행적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관심이 번지면서 감동적인 사건으로 변신했다.



그래서 성인은 작품에서 그분의 성덕 이전 세상의 악을 무찌르는 성 미카엘 대천사 수준의 성인으로 등장한다. 그러기에 성인 화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후광도 없는 늠늠한 장수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성인이기 이전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서 악을 행하고 있는 짐승들의 기를 꺽어 버리는 미카엘 천사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힘찬 백마는 바로 이 성인의 행동에 대한 하느님의 도움을 상징하고 있다.



이 세상의 온갖 사악함이 판치는 오늘은 토요일 광화문이나 여의도 광장에서 어떤 이상한 종교인이 벌리는 사악한 집회에 하느님의 도움이 개입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면 우리가 이 악한 행동에 분개하거나 불안하지 않고 평화와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 성인이 너무도 힘있게 보이는 오른 팔로 어둡의 세력을 누리고 있다.



백마가 선의 승리의 상징과 같은 것과 대조적으로 검고 칙칙한 어둠의 존재로 표현되는 어둠과 악마와 사악함의 상징과 같은 용을 짓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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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위에 올라 탄 기사와 너무도 멋있는 백마와 대조적으로 그 밑에 눌려 있는 칙칙한 색깔의 검은 물체들은 사악하고 힘없는 무능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서양화에서 용의 상징은 우리 동양과 전혀 다르다. 우리 동양의 용은 고귀함의 상징이기에 왕의 옷을 곤룡포라고 부르며 그옷에 용을 새기기도 하며 용은 고귀함의 상징으로 오직 왕에게만 유보하고 있다. 가뭄에 비를 내려주고 농사를 지켜주는 것이 용의 역할기에 용이란 존재는 선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 서민에게도 용은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였기에 민화에도 자기 용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용은 시험에 합격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고,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하는길상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용은 권력, 지혜, 보호를 상징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도전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용은 악의 상징으로 드러나면서 뱀과 전갈이 한테 어울린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영어로 용은 'dragon'인데, 이의 라틴어 어원인 'draco'는 본래 큰 뱀을 뜻하고 있다. 흉측한 일은 획책하는 악마성을 띈 동물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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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자기 뒤편에 있는 어린양의 어머니와 같은 귀부인을 칼로서 보호하는 일방 자기 발밑에 있는 악의 화신과 같은 용을 무찌르면서 악 을 제거하고 선을 키우는 하느님 사자의 역할하고 있다.



오른편의 성모님 상징인 귀부인과 그분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잘 보호하면서 악의 화신인 용은 사정없이 짖밟고 있는데 그 밑엔 전갈과 뱀도 우글거리고 있다. 이 흉측한 뱀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해서 낙원에서 추방되게 만든 그 뱀의 상징이며 이 세상에 악을 가져오는  만악의 뿌리를 상징하고 있다.



위편에 말을 타고 있는 성인의 모습은 너무도 밝고 큰 희망의 상징으로 선한 사람의 미래를 상징하는 반면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용과 뱀과 전갈로 엮어진 어둠은 오늘 광화문이나 여의도에서 광기를 피우는 악마의 화신과 같은 목사들의 사주에 빠진 광기의 크리스챤의 상징이기도 하다.



본인은 지금 토요일 아침 광화문에서 가까운 정동 수도원에서 이 원고를 마무리 하고 있으며 게오르그 성인으로 상징되는 상부와 악마의 권세로 상징되는 하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분명한 상징이니 우리는 위를 받아 들이기 위해서 아래의 사악한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성서의 다음 내용은 오늘 현실의 우리들이 되씹어면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생명의 말씀이다.



”너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 때문에 격분하지 말고 불의를 일삼는 자들 때문에 흥분하지 마라. 그들은 풀처럼 삽시간에 스러지고 푸성귀처럼 시들어 버린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1-5)



광화문이나 여의도에서나 용산 집에 칩거한 상태에서 악을 획책하고 있는 지도자들의 미래가 바로 이 작품처럼 이루어 진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가 평상심 속에서 희망을 지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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