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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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5-16)
은돈 서른 닢
유다가 유대인 사제들에게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주는 대가로 기꺼이 돈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요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고 자기 영혼에서 그분을 물리치는 대가로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받는 이들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실로, 돈이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죄를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배반하는 자는 누구나 유다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배반하는 죄의 대가로 이 세상의 이득을 주는 원수에게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며, 드러내 놓고 원수의 권능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유다에게 준 동전의 개수는 구원자께서 이 세상에 머무신 햇수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에 세례를 받으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곡식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서른 살 때였습니다(창세 41,46 참조). 그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만 곡식을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집트인들에게도 주셨듯이, 복음도 성도들을 위해 준비되었지만 불충하고 사악한 자들
에게도 선포되었습니다.
-오리게네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다움의 설명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새로운 빛을 수반하는 것이야말로 이 탄생의 특징입니다. 이 탄생은 영혼 안에 밝은 빛을 부어넣는데, 이는 어디에서건 흘러 넘치게 되어 있는 것이 선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탄생 속에서 하느님은 빛과 함께 자신을 영혼 안에 부어넣으십니다. 영혼의 본질과 터에는 그 빛이 너무나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영혼의 기능들은 물론이고 겉사람에게까지 흘러 넘칩니다. 바울로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그러했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길 위에서 그를 건드리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 빛은 바울로의 동료 여행자들이 볼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보이는 빛이었습니다. 그 빚은 마치 성인들을 두루 비추듯이 바오로를 두루 비추었습니다(사도 9,3 참조). 영혼의 터에 있는 빛이 몸속으로 흘러들면,그 결과로 몸은 광명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이 빛을 조금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빛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어둠”이라 불리는 죄와 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요한 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5). 그 이유는 이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짓과 어둠이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할 수 없고, 하느님과 피조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안으로 들어오시면, 피조물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이 빛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즉시 그 빚은 그 사람안에서 번득이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알려 줍니다. 그 빛은 그 사람이 전에 알고 있기는 해도 이해하지는 못했던 다른 좋은 가르침까지도 알려 줍니다.(371)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7-10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2절: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요환 후스와 콘스탄츠에서의 그의 재판:
공교롭게도 요한 23세가 도망한 후 첫 몇 주 동안, 즉 1415년 4∼6월에 후스 문제가 콘스탄츠에서 심의되었다. 그것은 매우 불행하게 진행되었고,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의
회에 매우 무거운 부담을 가지게 하였다. 우리는 긴장이 매우 많았던 시대적 배경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모든 면에서 우세하였던 격렬한 흥분을 고려해야만 이 문제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 후스는 1370년경 후시넥(남부 보헤미아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1400년에 사제로 수품되었다. 이 무렵 그는 영국인 요한 위클리프(약 1320∼1384)의 사상들을 알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1374년 이래 아비뇽 교황의 재정방법과 고위 성직자 교회의 부(富) 그리고 교계제도를 격렬하게 공격하고, 동시에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사도적 청빈으로 살아야
하는 영적인 “예정된 자들의 교회”를 대립시켰다. 위클리프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는, 선택된 자로 은총 지위에서 살고 있는 자들만이 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언명하였다. 특히 그것이 교회이건 국가이건 간에 그리스도교적인 사회에서 대죄인은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 대죄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황이나 주교 또는 성직지들에게는, 그리스도교 국가
의 통치자들이 대죄 상태에 있다면 그들의 통치권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러한 권한이 없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적인 구원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부인하였다.
1402년 이래 프라하의 베들레헴 경당의 설교가였던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변호하면서 체코인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민족적인 감정들이 주로 독일인으로 구성되어 있던 보헤미아의 지도급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과 결합되어 있었다. 반독일적인 기운이 보헤미아인들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또 그것은 위클리프 사상에 의하여 규정된 교회적 • 종교적인 경향과 매우 강하게 융합되었다.(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