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어제는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아무 인사도 하지 않고 나왔습니다.
나와서 제가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즉시 반성을 했습니다.
어찌 그렇게 무심하게 먹기만 하고 나왔다는 말인가?
평화를 빈다고 하든지 어떤 덕담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먹고만 나왔으니
이것은 사람이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돼지가 밥 먹고 나온 것이었지요.
이런 반성을 하면서 집에 돌아오니 달이 둥글고 휘영청 밝았습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달빛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봄인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식사 후 집에 오니 어제처럼 달이 휘영청 밝았었습니다.
술도 한 잔 하였기 때문인지 그때 제가 동창에게
“야, 니 처에게 전화해서 저 달 좀 보시라고 해라!”고 하였지요.
그랬더니 저보고 말하라고 해 늦은 밤 달 타령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너무도 좋으면 늦은 밤의 실례도 개의치 않고 전화를 하게 되는데
제가 어제 식당에서 아무 인사도 않고 나온 것은
제가 평화를 인사할 만큼 평화가 넘치지 않고,
덕담을 건넬 만큼 덕으로 제가 가득차지 않고,
복음을 전할 만큼 제게 복음의 행복이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그래서 반성을 합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가톨릭 신자 대다수가 그러한데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매우 조심스러워 합니다.
좋게 얘기하면 각자의 생각이나 신앙을 존중하여
무례하게 또는 함부로 나의 종교를 강권하지 않는 거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자기의 좋은 것이 넘치도록 좋지 않거나
자기의 좋은 것을 남과 나누려는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는 먼저 자기가 복음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더 자세히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복음을 선포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면 선포가 되지도 않기에
행복한 것이 복음 선포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행복이 그저 세상의 행복이라면 그 행복만으로는
복음의 선포를 하지 못하고 선포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이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복음의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먼저 내가 복음화 되어야 하고
세상에 복음의 행복을 전하기 앞서 내가 복음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이 복음으로 행복할 뿐 아니라 사랑도 넘쳐야 합니다.
자신이 복음으로 행복하면 그 행복이 넘쳐 자연스레 전해지기도 하겠지만
진정 행복하다면, 아니 진정 복음으로 행복하다면 사랑이 충만할 것이기에
그 행복의 복음을 자기만 가지고 있을 수 없고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 때문에 움켜쥐고 있다는 게 아니라
좋은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면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민족들의 복음화를 기도하는 오늘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복음으로 행복한가?
나는 복음의 행복으로 사랑이 충만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