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봅니까?”
어제, 오늘의 사도행전 말씀은 태생 앉은뱅이의 치유 얘깁니다.
베드로가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돈은 줄 수 없지만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고서는
거침없이 치유를 해주는 얘깁니다.
저는 과거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나도 저럴 수 있었으면!”하였습니다.
정말 제 주위의 딱한 분들을 치유해주고픈 사랑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베드로처럼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키면 병자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 확신, 믿음이 부러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도 그런 부러움이 없는 거는 아니지만
사랑과 믿음 중에 하나만 저에게 주어진다면 저는 사랑을 택하렵니다.
사랑 없이 믿음만 있는 것보다는
믿음이 없더라도 사랑이 있는 게 더 낫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에 치유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로 놀랍고 부러울 정도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 치유를 해주실 거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사랑이 부족하고,
가난과 겸손의 정신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능력을 잘못 씁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 체험이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능력의 하느님만 체험하고
무력의 하느님을 체험치 못하였고,
무력의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치 못한 겁니다.
우리의 시도신경 첫 마디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자를 믿나이다.”입니다.
이토록 성부 하느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이에 비해 성자 하느님은 “본시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해 죽는 하느님은 생각지 못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만 알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에게 “호산나 다윗의 후손”이라고 칭송받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였지만
십자가에 달려 힘없이 죽으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모든 희망을 접고 갈릴래아로 갔습니다.
희망을 접은 정도가 아니라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는 악마처럼
자기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배신하기까지 하였지요.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는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그러다가
권세가 땅에 떨어지자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없이 돌아가시고 자기가 배신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당당히 부활하셨고 자기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확실하게 체험을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자기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그 주님께서 아무런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능력의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그분은 끝까지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끝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때 확실히 깨닫고 주님에게서 배웁니다.
내가 무력해야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저 내가 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앉은뱅이의 치유로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인양 여길 때
베드로는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봅니까?”하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를 유심히 봅니까?”
어제, 오늘의 사도행전 말씀은 태생 앉은뱅이의 치유 얘깁니다.
베드로가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돈은 줄 수 없지만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고서는
거침없이 치유를 해주는 얘깁니다.
저는 과거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나도 저럴 수 있었으면!”하였습니다.
정말 제 주위의 딱한 분들을 치유해주고픈 사랑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베드로처럼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키면 병자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 확신, 믿음이 부러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도 그런 부러움이 없는 거는 아니지만
사랑과 믿음 중에 하나만 저에게 주어진다면 저는 사랑을 택하렵니다.
사랑 없이 믿음만 있는 것보다는
믿음이 없더라도 사랑이 있는 게 더 낫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에 치유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로 놀랍고 부러울 정도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 치유를 해주실 거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사랑이 부족하고,
가난과 겸손의 정신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능력을 잘못 씁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 체험이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능력의 하느님만 체험하고
무력의 하느님을 체험치 못하였고,
무력의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치 못한 겁니다.
우리의 시도신경 첫 마디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자를 믿나이다.”입니다.
이토록 성부 하느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이에 비해 성자 하느님은 “본시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해 죽는 하느님은 생각지 못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만 알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에게 “호산나 다윗의 후손”이라고 칭송받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였지만
십자가에 달려 힘없이 죽으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모든 희망을 접고 갈릴래아로 갔습니다.
희망을 접은 정도가 아니라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는 악마처럼
자기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배신하기까지 하였지요.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는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그러다가
권세가 땅에 떨어지자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없이 돌아가시고 자기가 배신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당당히 부활하셨고 자기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확실하게 체험을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자기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그 주님께서 아무런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능력의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그분은 끝까지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끝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때 확실히 깨닫고 주님에게서 배웁니다.
내가 무력해야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저 내가 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앉은뱅이의 치유로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인양 여길 때
베드로는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봅니까?”하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 !
이웃과 함께 나누고, 이웃을 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