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 말씀은 죄지은 사람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꾸짖음과 용서 두 가지인데 사실은 사랑 하나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꾸짖고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언뜻 생각할 때 꾸짖음은 미움이나 분노의 결과일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할 때 형제의 죄를 꾸짖을 수 있습니다.
물론 미움에서 또 화가 나서 꾸짖을 수도 있는데
미움이나 분노도 사랑의 찌꺼기이기에 불완전한 사랑의 꾸짖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경험합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은
꾸짖을 마음조차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이 한 톨도 없을 때는
상대가 불쾌해 할 것을 뻔히 알면서 그에 대해 신경 쓰기 싫고,
내 사랑이 부족하여 미움이나 분노 같은 악감정이
내 안에 조금이라도 얼씬거리는 것조차 우리는 싫습니다.
설사 사랑할지라도 꾸짖고는 그가 아파할 것이 마음 아파
꾸짖기보다는 꾹 참고 넘어가려고 하기 쉽습니다.
제 생각에 그리고 제 경험에 꾸짖는 것은
칭찬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칭찬은 큰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고 입에 발린 칭찬을 할 수도 있지만
꾸짖음은 정말 큰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용서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죄지은 형제에 대한 또 하나의 사랑이 용서입니다.
왜냐면 꾸짖는 이유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 것이기에
그가 뉘우치고 회개할 때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사실 누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용서할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뉘우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용서해주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었는데
진심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정말 기꺼이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란 나의 사랑이 증명이 되고 드러나는 것이고
그래서 나를 뿌듯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에서 보듯이 그 죄가 나에게 저지른 죄이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일곱 번 여덟 번 반복이 되면 얘기는 달라질 겁니다.
그의 죄로 인해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도 크고
그래서 내가 너무 고통스럽고 심지어 불행하기까지 하면
도저히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운데 그는 나의 용서로 발 쭉 뻗고 잘 것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있어도 용서하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없는 사랑을 최대한 동원하여 간신히 용서해줬는데
만일 그가 같은 죄를 내게 또 저지른다면 용서는 더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 그것도 반복되는 죄에 대한 용서는
사랑이 압도적일 때만 가능하고 행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죄로 인해 내가 아직 괴롭고 불행하기까지 한 사람은
그를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음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고,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나는 행복해야 함을 되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