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오늘의 첫째 독서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마르코를 자기 아들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복음 선포에 전념해야 하고
인간관계는 초연해야 하는 사도가 자기 아들이니 어쩌니 하는 게
사람에 따라서는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쓸 때의 베드로는 인정에 머물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아들도 버려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정말 자기 친 아들마저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그가 아닙니까?
인정은 이미 그때 떠났습니다.
아니, 버렸습니다.
이것은 저를 비춰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인정에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교만한 얘기가 아니라 전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겁니다.
전에는 인정에 매일까봐 일부러 더 냉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때는 정말 더 냉정하고 차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꽤 자유로워졌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이제는 미워하는 것이 부자유하게 하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저를 부자유하게 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부자유하지 않고,
누구를 내가 더 사랑할까봐,
그래서 편애를 한다는 구설수에 오를까봐 그리 염려치도 않습니다.
전에는 어머니를 더 사랑할까봐 어머니께도 너무 불효했는데
이제는 어머니도 더 사랑하고 사랑하는 걸 남에게 숨기지도 않습니다.
이럴 수 있음은 제가 다른 어머니들을 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어머니를 비롯하여 누구를 특별히 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정말 그럴까 의문을 제기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정말 사랑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예쁜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아직은 미움에서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 것조차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전에 비해 애증의 문제가 편한 옷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르코 사도는
베드로 사도에게 친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베드로 사도에게는 아들이었을 테지만
마르코는 더욱 애정이 가는 아들이었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였던 것처럼
자기에게도 복음 선포의 동반자이니 사랑이 더 갔겠지요.
그러기에 드러내어 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애정은
칙칙하지 않고 맑으며
쌀쌀맞지 않고 훈훈하며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합니다.
영적인 애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첫째 독서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마르코를 자기 아들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복음 선포에 전념해야 하고
인간관계는 초연해야 하는 사도가 자기 아들이니 어쩌니 하는 게
사람에 따라서는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쓸 때의 베드로는 인정에 머물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아들도 버려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정말 자기 친 아들마저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그가 아닙니까?
인정은 이미 그때 떠났습니다.
아니, 버렸습니다.
이것은 저를 비춰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인정에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교만한 얘기가 아니라 전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겁니다.
전에는 인정에 매일까봐 일부러 더 냉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때는 정말 더 냉정하고 차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꽤 자유로워졌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이제는 미워하는 것이 부자유하게 하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저를 부자유하게 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부자유하지 않고,
누구를 내가 더 사랑할까봐,
그래서 편애를 한다는 구설수에 오를까봐 그리 염려치도 않습니다.
전에는 어머니를 더 사랑할까봐 어머니께도 너무 불효했는데
이제는 어머니도 더 사랑하고 사랑하는 걸 남에게 숨기지도 않습니다.
이럴 수 있음은 제가 다른 어머니들을 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어머니를 비롯하여 누구를 특별히 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정말 그럴까 의문을 제기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정말 사랑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예쁜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아직은 미움에서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 것조차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전에 비해 애증의 문제가 편한 옷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르코 사도는
베드로 사도에게 친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베드로 사도에게는 아들이었을 테지만
마르코는 더욱 애정이 가는 아들이었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였던 것처럼
자기에게도 복음 선포의 동반자이니 사랑이 더 갔겠지요.
그러기에 드러내어 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애정은
칙칙하지 않고 맑으며
쌀쌀맞지 않고 훈훈하며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합니다.
영적인 애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