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한 맹인이 주님을 만나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얘기인데
늘 그렇지만 이 얘기에서도 우리는 큰 배움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맹인에게서 배움을 얻습니다.
예리고의 맹인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람을 꾸짖으며 잠자코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더 큰 소리로 악을 써가며 외칩니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절함이 크지 않은 사람, 그래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의 꾸짖음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리고의 이 맹인은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 겪은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고,
지금 자비를 구하는 마음도 너무 간절하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맹인의 말을 보면 이 사람이 태생소경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애초부터 못 보던 사람이었으면 못 보는 것의 고통이 크지 않거나
볼 수 있던 때와 비교하며 자신의 불행을 곱씹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보다가 못 보게 되었기에
단지 못 보는 고통과 불편함 이상으로 불행에 빠져 있었고
물리적 빛이 없는 어둠 이상으로 희망이 없는 어둠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포자기적으로 살고 있었는데
소문으로 들은 나자렛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을 지나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기도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자포자기의 절망에 희망의 불을 당겼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용기에 불을 당긴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처음 “예수님”이라고 부르며 자비를 구하던 맹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수께서 물으시자 “주님”이라고 부르며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실 좋은 분 예수님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구원이 그분에게 달린 구원자 주님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맹인에게서 겸손하고 간절한 청원을 배우고,
어떤 반대와 장애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기도 배우지만
바로 이 믿음, 나의 존재를 전부 거는 믿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오늘 주님의 행동으로부터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다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비를 청하는 맹인의 행위를 꾸짖으며 말립니다.
아마 그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큰일을 하러 예루살렘에 가시는 위대하신 분의 위대한 길을
예리고의 하찮은 존재가 막아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맹인이 결코 하찮치 않고,
맹인을 구하는 것이 결코 하찮치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빨리 가는 것보다 이 맹인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셨던 거지요.
우리는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때문에
사람이 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놓치고 삽니까?
이것을 깊이 반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