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한 해의 마지막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오늘 복음으로 선택한 구절은 왕이라는 이미지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루카 복음 9장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모습이나,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시거나 기적을 일으키시는 모습이 아닌, 어떻게 보면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가장 처참한 모습을 교회는 그리스도 왕을 기념하는 복음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야경에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빨간 교회 십자가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목걸이나 팔찌 등에서도 우리는 쉽게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원래 의미는 죄수를 사형시키기 위한 틀이었습니다. 다른 것보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그 당시에는 가장 치욕적인 죽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치욕적인 죽음과 왕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죄인을 높이 매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육적(?)인 목적일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치욕적인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가까이 모여들겠지만, 높이 매달았기 때문에 멀리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는 사람들의 눈이 집중되는 초점이 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왕에게는, 세상이 말하는 통치자에게는 모든 권력이 집중됩니다. 왕의 한 마디에, 통치자의 한 마디에 세상은 움직입니다. 중심이 된다는 점에 있어서 십자가와 왕권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예수님께 집중된다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당신께로 모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세상은 점점 일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기도 했던 때보다 더, 우리는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치를 위해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수많은 조직이 있고, 그 조직들 가운데 일치를 이야기 하지 않는 집단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방법입니다.
군림하는 왕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통치자로 이룬 일치는 쉽게 다시 분열되고 맙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선택해야지만, 다른 사람 보다 낮게 내려가야지만, 우리는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내려감이 치욕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지만, 그러한 십자가의 죽음만이 분열되어 가는 세상을 하나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낮은 자로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작은 한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왕의 신하가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 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형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우리 자신을 낮추어 갈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함께 하는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세상도 우리와 함께 하느님 안에 하나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