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천사의 말에 따라 밤에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로 갑니다.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산모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를 데리고 움직인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베들레헴에서 이집트까지, 그것도 낮이 아닌 밤에 이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낯선 나라에 정착해서 살아간다는 것, 언제까지 머물러야 할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지낸다는 것이 굉장한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아예 머물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다시 이스라엘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 육체적,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이 가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론 복음은 이집트로 가는 것이나,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것이나 구약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표현하지만,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떄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시련의 시간을 주시는지, 우리를 어려움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볼 때, 가정이 많은 위기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 경제의 어려움으로 가정 경제 또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 이혼율이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서로 바쁘다보니, 가정이 서로 사랑을 나누고 힘을 다시 얻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보다, 잠만 자고 나가는 기숙사의 모습으로 변해가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환경적인 영향 때문에 자녀를 갖는 것이 쉽지 않고, 그러다보니 가정이 점점 더 작아지는 느낌입니다.
물론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앞에서 이야기 하지 않은 또 다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정을 볼 때, 가정의 어려움은 어제 오늘 만의 이야기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 당시나 지금의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 같다면, 우리의 가정도 성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가정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한 때 파혼까지 생각했습니다. (마태 1,19) 그리고 그것은 요셉의 입장에서 정당한 생각이었습니다. 아내의 임신. 하지만 자신의 의로움에 흠이 생겨도,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1,24) 그리고 이집트로의 여행이나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길은 요셉에게 있어서 마리아와 예수를 위해서 많은 것을 감수해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마리아 역시 요셉과 예수를 위해서 힘든 길을 마다 않고 걸어갔습니다. 출산 이후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토로하기 보다는 가족들을 위해 참고 인내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있다는 것, 나도 힘들지만, 힘들어 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조금 더 움직이고, 조금 더 고생하는 것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 안에 예수의 성가정처럼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동안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희생을 봉헌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성가정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쁘시겠지만, 오늘 하루, 아니 단 몇 분만이라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족 옆에 함께 있다는 것,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을 수 있는 식구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 그것이 기쁨으로, 축복으로 다가오는 하루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