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나고,
예수님보다 먼저 사람들 앞에 나선 세례자 요한에 대한 궁금증이 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묻습니다.
이런 물음에 요한은 자신의 신원이랄까 정체에 대해
정확히 그리고 서슴없이 얘기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정확히 그리고 서슴없이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자기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음은 물론이고
자기 정체를 다르게 얘기하거나 겉꾸밈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범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나의 정체를 가감 없이 똑바로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정체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인식하고 드러냅니다.
하나는 “아니요”, 곧 부정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사람이요”, 곧 긍정의 방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아도 아니라고 하고,
자기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리이고,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선 “아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신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나임을 알아야 하고
나는 신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처럼 터무니없이 자신을 과신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짐승만도 못한 경우가 수두룩한데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짐승만도 못한 것이 신인 양 거들먹거린다면 얼마나 우습고 역겹겠습니까?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애기하듯 영으로는 하느님과 비슷하게
육신으로는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창조된 자신임을 인식하면서
이렇게 나를 만드신 하느님을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얘기해야 하는데,
나를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고 저렇게도 얘기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자기를 얘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리스도인답게 자기를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제가 과거에 그랬듯이
나는 나일뿐 다른 누가 아니라고 독불장군처럼 오만불손하게 얘기하거나
인격이나 성격 차원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나는 누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리라고 얘기하고,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미천하다고 얘기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모든 편지 1장 1절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오로>라고 소개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오로>라고 소개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위대하신 왕의 사신>이라고 소개하고,
그의 전기 작가는 그를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위대한 성인들은 모두 이토록 관계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적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관계적인 정체성을 그리스도와 관계에서 가지고 있습니까?
사장님, 회장님이라고 불리기 좋아합니까?
누구의 엄마와 아빠로 불리기 원하십니까?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누구로 불리길 원하십니까?
이것을 되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