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How nice it is!
나병환자와 주님과의 관계가 참으로 멋집니다.
그런데 무엄하고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주님보다 나병환자가 제게는 더 멋져 보입니다.
게는 가재 편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의 자세를 그가 지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을 하게 하기보다
강요에 의해 사랑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장되게 연민을 자극하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사람,
내가 이토록 사랑하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
도울 마음이 없는데도 하도 귀찮게 졸라 억지로 돕게 하는 사람,
신자라면 원수도 사랑해야하는데 왜 나를 사랑치 않냐는 사람 등.
사람에게도 그러니 하느님께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주님께 드리는 우리 청원기도의 대부분이 이런 형태입니다.
매우 겸손한 청원의 형태를 띠고 있어도 사실은 강요지요.
이에 비해 오늘 나병환자는 주님의 사랑이 참으로 빛나게 합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완전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고,
주님의 선의에 대해서는 최고의 존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그에게 없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고 안 고쳐주시고는 능력의 문제가 결코 아니고
고쳐주실 것인지 말 것인지 주님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병이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못 고치시기 때문이 아니라 안 고쳐주시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자신의 병을 안 고쳐주시는 주님의 뜻도 그는 존중을 합니다.
허나 속으로는 야속해하면서도 겉으로 존중한다고 하는 우리와 달리
그는 안 고쳐주셔도 마음으로부터 주님 뜻을 존중하고 감사해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선, 주님의 뜻이라면 나병을 계속 지니고 살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을 지니고 살아온 이 병을 이제 와서 못 견디겠다는 게 아닙니다.
나병 때문에 많이 고통스럽긴 해도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청하는 것은 불행하기 때문에 고쳐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다만 자기를 고통에서 구해달라고 자비의 주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세 번이나 자기 머리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청했지만
주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자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고통을 면하게 해주십사고 청하지만 주님의 더 높으신 뜻에 맡기는 겁니다.
그것은 그가 주님의 선의와 사랑을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고쳐주시건, 고쳐주시지 않건
주님의 선의와 사랑에 대한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안 고쳐주시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고쳐주시지 않는 주님의 뜻을 존중하고
고쳐주시지 않는 주님께도 감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얼마나 더 고통으로 정련되어야지
오늘 나병환자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