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봄
작가 : 산드로 봇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 1510)
크기 : 203 x 314cm. 1478년 작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카니발이 시작 된다. 사순절의 엄격한 실천을 통해 삶의 질 향상을 결심하는 이 시기에 절제와 정반대의 축제의 성격을 띤 카니발은 자기의 목표와 전혀 반대되는 어떤 엉뚱함에 잠시 몰두한다는 것이 목표 달성은 물론 뇌의 오른쪽과 왼쪽의 균형 있는 사용이 전인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원리와 같이 삶의 생기 확인에 큰 도움이 됨을 생각하며 이번 성미술 코너의 카니발 성격의 주제로 봇티첼리의 <봄>을 감상하기로 하자.
봇티첼리는 중세 르네상스의 도시인 피렌체의 안정된 가정에서 태어나 그 도시의 명망있는 한 금은 세공사 밑에서 견습생활을 하면서 그 도시의 여러 화가들로부터 수업을 받아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평판이 알려지자 프란치스칸 교황인 식스토 4세의 요청으로 로마에 가서 활동을 하다가 피렌체로 돌아와 피렌체의 예술을 부흥시킨 메디치 집안의 부탁으로 그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과 여기에 소개하는 <봄>을 그렸는데 이것은 이태리의 르네상스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두 그림은 우선 아름다움의 여신인 비너스를 주제로 한 것이나, 르네상스 작가답게 관능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으로 비슷한데, 그전까지 교회가 가르친 영혼의 정화를 위해 육체를 억제해야 한다는 부정적인 견해에 대한 반발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희랍문화에로의 복귀 현상을 일으키며, 이것이 르네상스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의 정직한 노력과 작품 활동에 의해 오늘 서양인들이 동양인들 보다 죄의식을 덜 느끼며 자연스럽게 육체를 표현하게 되는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그림은 관능의 상징으로 비너스와 봄을 등장시킨다. 봄은 생명이 탄생하는 계절이고 생명은 관능을 통해 오게 되기에 봄, 관능, 생명을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있으며 이 그림도 이런 면에서 관능의 생명력과 긍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선 음악적 리듬을 타고 오른쪽에서부터 보아야 한다. 청색의 올리브가 너무 우거져 어두움을 띤 숲속에 서풍인 제피로(Zefiro)가 입을 부풀리며 바람을 불고 있는데, 서풍은 봄을 부르는 바람이나 우리말의 꽃샘바람처럼 살을 파고드는 매서움이 있는 추위이기에 어두운 색깔로 그려져 있다.
이 서풍이 희랍 봄의 여신인 클로리(Clori)의 허리를 잡으며 봄기운을 불어 넣자 여신의 입에서 꽃이 흘러나오며, 이것이 이태리 봄의 여신인 플로라(Fiora)로 변하게 되면서 희랍 문화와 이태리 문화의 연결고리를 바로 르네상스가 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봄바람 제피로의 아내이기도 한 플로라는 봄기운을 받아 온몸으로 꽃을 피우며 바람이 부는 대로 꽃을 뿌리게 된다.
그런데 봄을 주관하는 여신은 바로 비너스이기에 정원의 중앙에 성모님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으며 그 발 뿌리에는 여러 아름다운 꽂들이 만발하다. 비너스의 오른쪽에 너무도 아름답고 우아한 옷을 입은 세 명의 여신이 춤을 추고 있는데 그 위를 사랑의 신인 큐피트가 화살을 겨누고 있다. 봄의 기운에 흥겨워 춤을 추고 있는 관능적 차림의 여신들이 큐피트의 화살을 맞으면 사랑의 열병에 걸려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여신들은 비너스와 또 다른 관능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 관능이라고 할때 우리는 뭔가 어둡고 끈적거리는 것을 생각하기 쉬우나 이 여신들을 통해 표현된 관능은 비발디의 음악처럼 너무나도 밝고 경쾌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신들은 매혹적으로 투명하게 비치는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봇티첼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당시 일반적으로 통하고 있던 두껍고 진한 탬페라(Tempera) 안료 대신 아마유를 용매제로 사용하여 밑에 칠한 색체가 보이게 안료를 얇은 층위에 덧바르는 기법을 사용함으로서 여신의 생명력을 더 하게 만들었다
봄기운은 사람을 들뜨게 하듯 관능의 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사랑의 열병 속으로 자신을 던지게 만든다.
오른쪽 그림에 한부분이 드러나고 있는 봄의 여신, 플로라의 손에 가득한 꽃 묶음들, 숲속 오렌지 나무에 가득히 달린 열매들은 영원을 상징하며 그러기에 큐피트의 화살에 맞아 사랑의 열병에 빠지는 인간들은 허망함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영원한 열매를 맺음을 이 그림은 강조하고 있으며, 그림은 전체적으로 빛-어둠-빛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 봄의 화사한 생명력을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일 왼쪽에 신들의 사자인 머큐리 (Mercurio)는 이 아름답고 상스러운 곳에 악령의 힘이 발부치지 못하도록 삼지창을 들고 구름을 쫓고 있고, 이 그림에 그려져 있는 190여종의 꽃은 3월에서 5월 사이 피렌체 지역에 피는 것을 그림으로서 피렌체가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는 생명과 봄의 도시임을 강조했다.
그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과 <봄>은 주제 설정도 비슷하며 무엇보다 주인공인 비너스가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봇티첼리가 찾은 이 비너스의 모델은 당시 피렌체 최고의 미인으로 불리던 “시모네타 베수브치”였다.
그녀는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성함을 느끼게 하는 미인으로 인정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왔는데, 미인박명이라던가 스물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났기에 더욱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보티첼리는 이 그림을 그리며 자기의 사랑을 담았으나, 그녀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자기도취증에 빠져있었고, 당시 피렌체의 실세(實勢)인 메디치가의 도련님 쥴리오의 정부(精婦)였기에 애송이 화가인 봇티첼리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으니, 그는 완벽한 짝사랑을 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사무침을 이 그림으로 표현해 사랑을 갈망하는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랑의 기쁨과 그리움을 선사했다.
이런 면에서 짝사랑의 표현도 동양과 서양은 너무 다르다. 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체념과 함께 한(恨)으로 승화시키는게 동양인의 짝사랑이라면, 봇티첼리는 그 짝사랑을 상대방의 무관심과 냉담을 개의치 않고 끝까지 추구함으로서 우리에게 사랑과 봄과 생명의 기쁨과 그리움을 선사했다.
그리스도교는 누가 뭐래도 사랑의 종교이다. 하느님과 인간에의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순교자들을 모시고 공경하는 우리들이고 프란치스칸들은 요한의 첫째 편지에 나오는 <하느님은 사랑 이십니다> (4, 7-12)라는 말씀을 우리 카리스마의 중요 표현으로 여겨 실천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사는 우리 인간들이 그 큰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너무 왜소하기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크나큰 사랑을 축소 아니면 왜곡함으로서 하느님 사랑을 일부 탈색 시킨게 아니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마더 데레사로 표현되는 인간사랑, 봉쇄 수녀원의 기도 안에 느끼는 하느님 사랑은 자연스럽고 고상스럽게 보면서도 영화에 나타나는 연인들의 사랑이나 결혼식장에서 만나는 신혼부부의 사랑, 즉 관능의 냄새가 풍기는 것은 위험스럽다거나 아니면 이등품 사랑으로 여기지 않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교회가 독신생활의 가치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부부생활의 가치를 폄하 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현실에서 하느님 사랑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봇티첼리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야 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관능으로 표현되는 사랑은 결코 위험한 것만 아니고 우리 인생의 봄과 생명에의 환희로 초대한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회복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균형 있게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타나는 색시공(色是空)은 관능의 세계 보다 더 폭넓은 개념이지만 감각세계에 대한 조심성의 표현이라면, 우리말에 약간 천하고 위험함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색(色)의 복음화를 봇티첼리는 제시하고 있다.
사순 첫째 주간 본기도의 내용 “해마다 사순절을 거룩히 지내는 저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착한 생활로 그 열매를 맺게 하소서”처럼 삶에서 느끼고 만나는 생명과 봄, 사랑과 관능의 바른 의미를 배워 삶의 균형을 찾는 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이 그림도 사순절의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