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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에른스트-아기 예수님을 체벌하시는 성모

by 관리형제 posted Jan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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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명의 증인 앞에서 아기 예수님을 체벌하시는 성모
작가 : 막스 에른스트 (Marx Ernest, 1891- 1976)
크기 : 유화 190cm X 130cm (1926년 작)
소재지 : 독일 쾰른 빌라프-리하르즈(Wallarf- Richartx) 미술관

변화의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 역사 시초부터 진행된 변화는 이제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눈송이처럼 변화의 양이 가속되면서 현대에 와선 더 빠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오던 시대에 완곡하고 여유 있던 변화에 비해 현대 예술은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급격한 변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초현실주의(Surrealism) 영향 아래 있던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에서 이것을 극명히 체험할 수 있다.

그는 1891년 가톨릭 영향이 강한 쾰른의 유복하고 열심한 가정에서 태어나 본(Bohn)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다,

우연히 그림에 접하면서 철학은 뒷전으로 돌리고 마치 전생(前生)에 그림쟁이의 팔자를 타고난 것처럼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특히 정신병자들을 위한 요양시설을 방문하는 기회에 환자들이 그린 그림이나 조각들을 보면서 무척 감동을 받았다.

, 그는 기성의 어떤 화풍(畵風)이나 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명실상부한 새롭고 환상적인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는데 이것은 바로 그 시대의 영향과도 결부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과거 예술이 쌓아둔 모든 틀을 깨트리고 새로운 환상을 시도했기에 생경스러움도 없지 않지만 내면엔 그가 쌓아온 철학적 깊은 사색이 깔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20세기 초반엔 다다이즘(Dadaism)이라는 예술풍조가 있었다.

, 이것은 소위 크리스챤 신앙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의 근본을 살고 있다는 유럽사회가 1차 대전이라는 야만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환멸과 혐오를 느낀 사람들이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전쟁의 원인 제공과 비극을 막지 않고 방조했던 전통적인 가치에 반기를 들면서 만든 운동이다.

, 모든 기성의 관념이나 질서에 대해 먼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 모든 것에 반항하는 것, 즉 기성의 모든 도덕적,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이 과정에서 인간의 진정한 기원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 다다이즘의 대표로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작가의 그림은 우리에게 가히 충격적일 만한 모습을 보이고, 지난번에 우리는 라파엘로의 작품인 어머니 보다 더 아름답고 자애로운 성모님을 만났으나, 이 작가의 성모님은 아들을 채벌하시는 어머니로서 과거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에서 성모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든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모습으로 아들 예수를 사정없이 때리고 있는 모습이다

.사랑하는 자녀가 저지른 잘못의 교정을 위해 부모로서 심사숙고 후 아픈 마음으로 하는 교육적인 체벌이 아니라, 정신을 가누기 힘들 만큼 분노한 모성의 표현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얼마나 분노가 대단했던지 신성(神性)의 상징인 후광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도 모르고 아들을 구타하고 있다.

아들인 예수님을 엎어 궁둥이를 때리는 성모님의 모습에서 여느 어머니들의 분노를 발견하게 되며 아이를 키워 본 부모들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육아과정의 한 모습일 수 있다.

비록 성모님은 여느 여인과 같은 모성을 지닌 여인이긴 해도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이시고, 아들 역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엄연한 하느님 아들의 신성을 지닌 분이고 보면 범상스러운 모자 관계에서 여느 어머니의 감정폭발을 연상시키는 이런 행동이 너무 이상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뒤의 창문에서 이 광경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세 명의 증인이란 당시 초현실주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던 시인인 앙드로 부르동, 폴 엘뤼아르, 그리고 작가 자신이며다.

이 그림에서 아기 예수는 당시 사회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하는 자기들이며 이 아기 예수를 구타하고 계신 성모님은 바로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교회로 상징되는 모든 기성관념이라고 생각했기에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런 설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작품성이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것이긴 해도 공들인 데생과 매끈한 기교를 보이고 있다.

서서 예수님을 때리시는 성모님과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어머니의 손안에 있는 아기 예수님이 만든 삼각형의 구도는 초현실주의 양식과 잘 부합하고 있다.

작가는 이 그림에서 그동안 여러 화풍의 화가들이 교회가 강도를 더하면서 강조한 성모님의 동정성 신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평범한 여인의 모성 신비를 성모님에게서 찾고자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신앙의 고장인 쾰른에서 성직자들의 큰 반발을 일으켜 그의 작품 전시회를 막았을 뿐 아니라, 쾰른 대성당에서 전례 중 공적으로 이 그림의 부도덕성을 강조한 후 파문을 선포했는데, 바로 그 미사에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작가의 아버지가 참석하고 있었다니 그 참상은 가히 상상할 만하다.

크리스챤 신앙과 휴머니즘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는 현실에서 큰 충격을 주었던 이 작품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

벗을 위해 생명을 내놓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크리스챤 정신은 휴머니즘의 근본을 표현하기에, 휴머니즘의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

그러나 , 실재에 있어 이것이 제도화된 교회의 틀 안에서 표현되는 과정에서 교회 가르침의 표현을 더 강조하다 보면 현실적으로 세상의 휴머니즘을 수용하지 못하는 옹졸함을 보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 이 작품에 심히 불쾌한 심기를 보인 교회의 태도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 증인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면서 이 흐름을 주도했던 부르동은 다다이즘에 대해 단호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초현실주의는 남성명사로서, 말로써, 글로써, 다른 모든 방식을 통해, 과거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고의 실재 작용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순수한 정신적 자율성의 표현이라고 했다.
.


전통적인 작품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 그림은 황당한 느낌과 함께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경감을 줄 수 있으나, 이 작품에서 우리는 다른 화풍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조선시대 민속화가인 김홍도나 신윤복의 민속화(民俗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강한 해학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인간적인 가식, 위선에서 자유로움을 목표로 하는 이들은 이것을 극복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건강한 웃음이라 여겼기에 괴상하게 보이는 이들의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유모어 감각이다.

예수 아기를 때리는 성모님의 모습 역시 깊은 눈으로 바라보노라면 놀라움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아들과 인간 어머니가 만들고 있는 웃음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게 된다.

그러기에 위의 작품 뿐 아니라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우리 눈에 엉뚱하게 보이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강조했던 다른 화풍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자유로움과 건강한 해학을 지니고 있다.

또한 작가는 과거 예술 활동이 조화와 균형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소홀히 했던 창의성의 계발이란 면에서 새로운 획을 그었다.

초현실주의 표현은 과거 예술이 지나치게 질서를 강조함으로서 키울 수 없었던 예술의 생명과 같은 창조성 개발에 기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바로 400년 전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가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이었다.

 

제목 : 대립교황 (Antipapa: 1941-42)
작가 : 막스 에른스트 (Marx Ernest, 1891- 1976)
크기 : 유화, 160.8 X 127 cm
소장지 : 베네치아 구겐하임 현대 미술관


소개하는 <대립 교황>은 작가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인데, 교회역사에서 1309- 1377년까지 교황은 정치적인 이유로 교황청을 불란서의 아비뇽(Avignon)으로 옮기면서 교황이 둘이나 셋이 대립되어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추태를 연출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그린 것이다.

복음이 잘못 표현된다는 것은 어떤 지엽적인 착오가 아닌 근본이 잘못되는 것, 즉 거꾸로 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 교황들은 과거 여러 화가들이 그린 바티칸 궁의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그런 인물상이 아니라, 묵시록적인 어둠과 을씨년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렇게 대립교황 시대의 참상을 알리고 있으나 인물 묘사에 있어 흉물스러운 동물상에서 해학적 정서를 빠트리지 않고 있다.

신체의 일부를 노출시킨 부분에서 그들이 절제해야 할 욕망에 대한 집념을, 오른쪽에 갑옷을 입은 검은 말과 창들에서는 영적 지도자가 아닌 세속 군주로서 세력 확장에 지칠 줄 모르는 집념을 보였던 타락한 교황들의 탐욕을 묘사하면서도, 이것이 처참한 모습이 아닌 어릿광대의 치기(稚氣)를 느끼게 만든다.

어느 역사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착한 사람들이 만든 선행이나 성공담 보다 악인들이 저지른 악행이나 실패담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그는 초현실주의로 표현되는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너무나 새로운 시도를 해야 했기에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불안도 체험했어야 했다.

아무리 신념이 뚜렷한 선각자라도 다른 사람이 한 번도 여행한 적이 없는 미지의 땅을 답사할 때 느끼는 불안과 긴장이 있게 마련이듯 이 작가의 그림에선 과거 여러 화풍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평안함 보다 해산의 진통을 겪고 있는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불안과 긴장을 더 느끼게 된다.

그는 과거의 틀을 깨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불안과 긴장을 체험하긴 했으나, 틀을 깨트린 사람, 틀에서 해방된 사람의 자유를 만끽하며 오딧세이적인 풍류객(風流客)으로서의 멋진 인생을 즐겼다.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선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좁은 틀과 편견을 깨뜨리는 시도를 해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작가는 우리를 새로운 미의식의 출애굽 체험으로 초대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작가 보다 천년 훨씬 더 앞서 우리에게 크리스챤으로서 지녀야 할 폭넓은 미의식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하느님,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은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도 아름답고, 땅에서도 아름답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모습도 아름답고, 고통중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생명으로 초대하는 모습도 아름답고, 죽음을 염려하지 않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도 아름답고, 무덤 안에서도 아름답고, 하늘에서도 아름답습니다.
이해하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들으십시오.
육신의 나약함 때문에 그분 아름다움의 광채를 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의 [시편 주해 4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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