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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마사치오-삼위일체

by 관리형제 posted Jan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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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삼위일체 (1427년 작)
작가 : 죠반니 마사치오 (1401- 1428)
크기 : 667X 317cm, 프레스코화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三位)가 한분(一體) 하느님이심을 가르키는 것으로 야훼 하느님의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세 위격(Persona)에 있어 완전히 구별되면서 동시에 한 신성(神性)을 이룬다는 뜻인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덕분으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교 구원에 대한 근본교리를 요약하는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신(神)개념 이해에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면서도 이것은 설명도, 알아듣기도 어려우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내용에 답답함이 있다.

오죽 했으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방대한 <신학대전>에서 이것의 설명에 고심하다가 마태오 복음 17장에 나타나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 사건으로부터 성삼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성부께서는 목소리로, 성자께서는 사람으로, 성령께서는 구름으로 나타나셨다 (Tota Trinitas apparuit; Pater in voce; Filius in homine; Spiritus in nube clara)”는 상징적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삼위일체 교리는 설명도 이해도 어렵다는 정서가 지배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모호함과 답답함이 아닌 가슴이 후련히 뚤리는 명쾌하고 시원한 삼위일체의 실상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이 그림은 27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던 작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죽음 앞에 바친 진혼곡(Requiem)이며,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음울한 묵상이기에 작가의 다른 그림과 달리 색체 처리가 전체적으로 어둡게 표현되고 있다. 중앙 부분의 성부께서는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달려 늘어진 아들의 팔을 부축하고 있는데, 이 두 분의 형상은 전체 균형에 안정감을 주면서 장엄한 표현이 되고 있다.

그전 작가들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을 항상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리면서 심판주로서의 역할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는 승리자이신 하느님으로 묘사했으나, 작가는 이런 기존 틀에서 벗어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성부께서 받들고 계신 것으로 그린 것은 두 분 사이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과 함께, 이것이 제단화이기에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거양성체 때 이 그림을 우러러 봄으로서 성찬을 통해 표시되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더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성자는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으로 땅을 딛고 있지만 성부는 천상적 존재이기에 죄 많은 세상에 발붙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성자를 부축하고 있는 공중에 뜬 모습으로 그리면서 성자의 구속자적인 역할의 강조와 두 분 사이의 특성을 명확히 구분했다.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리기 몇 백년 전, 신학의 천재로 평가되는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고심하며 바닷가를 거닐던 중 어떤 어린이로부터 바닷물을 조개껍질로 다 퍼 담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신탁에 가까운 말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듯이 이 교리는 설명도 이해도 어렵다는 체념에 가까운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현실에 도전하는 뜻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이 있는 성당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당시 교회의 쇄신을 위해 새로 설립된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칸들이었고, 이들은 당시 교회에 큰 골칫거리로 남아 있던 이단들을 소멸하기 위해 당대 사람들에게 더 마음에 와 닿는 생기 있는 신학 연구의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는데 삼위일체 교리의 새로운 설명은 교회에 대한 봉사와 함께 설교 수도회로서 새로 출범한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이것을 예술의 도움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과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에 접근하였다.

다행이 이 수도원에는 당시 도미니꼬 회원으로서 탁월한 신학자요, 수학자요, 인문주의자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던 알렉시오 스트로치 (Alessio Strozzi)가 있었는데, 작가의 예술적 감수성과 도미니꼬 회원들의 이런 정서가 맞아떨어지면서 작가는 이 멋진 인문주의 신학자의 신학자문을 받으며 이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먼저 크기 설정에서부터 이 원칙을 적용했다. 이 프레스코의 크기는 위에 제시한 대로 상당한 대작인데, 단순히 제단 공간을 매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서적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창문의 아랫 부분을 메우면서 이 칫수를 유지한 것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 아들의 역할을 창세기에 나타나는 노아의 방주와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창세기 7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세상은 이제 막판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저것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기로 하였다... 그 배는 이렇게 만들도록 하여라, 길이는 삼백 자, 나비는 오십 자, 높이는 삼십 자로 하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크기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방주 크기와 같기에 작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야 말로 바로 홍수의 심판에도 살아남게 만든 노아의 방주사건처럼 인간의 생명 구원과 직결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 다음 이중으로 된 문은 죽음의 문과 승리의 문으로 개선문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앞에 근사하게 나타나고 있는 큰 개선문은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문이나 꿀처럼 달콤할 때도 있지만 언젠가 허망함으로 마무리되는 세상의 삶을 상징하는 죽음과 실패의 문이요, 그 안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그 문이 바로 생명의 문이요, 승리의 문임을 강조하고 있다.

밑바닥에 있는 해골은 모든 인간들에게 절박한 현실로 닥칠 죽음과 심판을 (Memento mori) 가르치고 있다. 성부의 부축임 속에 십자가에 달려 계신 성자는 당신 시선을 앞부분 석관 아래 있는 해골에 두고 계시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타의 상징이 바로 해골이기에, 십자가 그림에는 해골이 그려지는 예가 많으나 작가는 과거와 달리 여기 해골 전체를 담고 있는 석관을 그려, 성서에 나타나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통해 십자가 구속 효과를 더 분명하게 설명코자 한 의도에서 나왔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 12; 19).

성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골고타 언덕에 7세기에 마련된 초대 크리스챤들의 집회소가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해골 하나가 나왔는데, 골고타 사건에 대한 깊은 신학적 사색을 하던 신자들에게 이것이 바로 아담의 해골이라는 생각으로 정착되었다.

작가는 바로 초대교회 신자들의 이런 신학적 사색을 도입해 해골 전체가 있는 석관을 배치했다. 이 그림에 있는 해골의 골격을 살펴보면 갈비뼈 하나가 없는데, 이것은 어떤 인간의 해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후손인 우리들에게 실낙원의 아픔과 업보(業報)를 남긴 아담의 해골임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깊은 의도의 표현이다.

즉 새 아담이신 주님은 아담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시고, 실낙원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사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강조하면서 승리의 문, 죽음의 문과 같은 대비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아담의 해골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치기(稚氣)가 담긴 단어 사용으로 가령 I를 제거하는 축소법을 사용해 읽기가 선뜻 쉽지 않으나 분석해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의 어제는 너희들의 오늘이요, 그리고 나의 오늘은 바로 너희들의 내일이 되리라>.

이것은 죄의 유혹에 빠져 낙원을 상실했던 아담이, 자기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시행착오의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에 있는 후손들인 관객들에게 주는 교훈이며, 자기처럼 어리석은 유혹에 빠지지 말고 자기를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깨어 살아라는 강한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성모님은 전통적인 표현처럼 당신 아들의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관객에게 돌려 손으로 십자가에 달린 당신 아들을 보라고 초대하시고, 사도 요한은 이런 성모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응시하고 있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은 이 그림을 봉헌한 기증자 내외이다.

jovanni02.jpg

이 그림의 백미는 십자가에 달린 성자를 부축하고 계신 성부의 붉은 색 가슴을 덥고 있는 수염으로부터 나와 성자의 머리 위를 비추는 흰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시다. 십자가에 못박힘이라는 극심하고 처참한 고통을 통해 표현되는 사랑의 교차로에서 성삼위가 서로 만나고 있는데, 이런 삼위일체가 보이시는 사랑은 신앙 없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역설이며 모순투성인 그런 사랑이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성부의 사랑과 성부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더 없이 아름다운 언어로 구구절절 강조하고 있는데, 이 사랑의 결말이 골고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무리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성부의 편에선 그분은 전능하시기에 십자가의 죽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아들이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하도록 도와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나, 당신은 고난의 잔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사랑하는 아들의 너무도 처절한 간청을 침묵으로 묵살하시고 (루까 22, 39-42), 그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죽어가게 하셨다 (마르 15, 33-35).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관계를 지탱케 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 사랑인데, 작가가 전통적인 표현의 비둘기로서 성부의 가슴으로부터 성자의 머리로 내려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성삼위의 관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의 운명애(Amor pati)와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어느 면으로 보던지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서도 사랑을 하는 것, 어떤 참혹한 처지에서도 세상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가장 숭고한 사랑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처절한 고통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라 믿었기에 작가는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그 매력적인 사랑의 표현들은 바로 삼위일체에서 완성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거 여러 신학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한 몸(體)과 세위(位)와 같은 들을수록 더 오리무중의 답답함에서 해방되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지성으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사랑의 가슴 안에서 가능한 감성적 체험임을 일깨우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끼리끼리 똘돌 뭉쳐진 그런 사랑이 아닌, 아담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관통하는 시원한 사랑의 신작로(新作路)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프레스꼬(Fresco) 작업은 젖은 석고가 마르기 전에 안료를 발라서 스며들게 해야 하므로 일일 공정이 엄격히 구분되는 힘든 작업이기에 그냥 내키는 대로 쉬엄쉬엄 할 수 있는 일이 못되며 대단히 긴장을 요하는 작업인데, 작가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는 것은 작품 속에 나타나는 성자의 모습을 닮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깎아 바친 숭고한 봉헌이라 볼 수 있기에, 이것은 작가가 짧으면서도 불꽃처럼 열정적으로 살다간 삶에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며 자신의 신앙고백임과 동시에,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신학과 예술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시도했다.

이 작품은 크기 뿐 아니라 내용, 정성 면에 있어서도 어떤 작품과 비길 수 없는 대작(大作)이다. 이 작품을 인쇄해서 90도가 되게 옆으로 돌려 세워 보면 맨 아래에 있는 해골이 들어있는 석관과 기증자 내외가 그림 밖으로 크게 돌출하면서, 그 안으로 성모님 사도 요한이 등장하고 성삼위는 동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원근법 처리에 있어 대단히 탁월한 것이며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라는 신앙의 내용을 강하게 상기시키고 있다.

예술이란 단순히 사람들이 여유가 좀 생기면 눈 돌릴 수 있는 고급스러운 취미의 하나가 아니라 지성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접근이 어려운 인간의 또 다른 진실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면 예술은 복음의 또 다른 표현이며, 이런 면에서 예술의 대중화(大衆化), 예술 애호가의 저변확대야 말로 복음화의 효과적인 수단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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