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기도에는 두 가지 기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러운 영의 기도와 주님의 영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오십사고 청하는 기도와
주님께서 오지 마십사고 청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다음 구절을 처음 발견하고는 의아해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더러운 영이라면 주님과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마주칠지라도 엎드려 절하지 않을 것 같은데
멀리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달려오기까지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절까지 하니 겉으로 볼 때는
만남에 아주 적극적이고 매우 겸손하고 공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영의 적극성이 어떤 적극성이고
엎드려 절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적극성이 아니고 존경의 큰절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언젠가 개의 행태를 보고나서였습니다.
자기 구역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개가 막 달려와 물을 듯 짖어대는데
진짜 자기 영역을 지배하고 있고 지배할 자신감이 있는 개,
다시 말해서 두려움이 없는 개는 으르렁거리지도, 달려들지도 않습니다.
느긋이 누워 있다가 정말 자기 영역을 침입하면 그때서야 행동하지요.
그러므로 매우 시끄럽고 짖어대고 사납게 달려드는 개는
사실은 두려움이 많은 개이고, 힘이 없는 개입니다.
더러운 영도 이런 개처럼 주님을 사랑해서 다가오고 달려온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기 영역의 침입자로 여기고 자기 영역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절하는 공손함도 존경이 아니라 간청을 하기 위한 것인데,
그 간청이 있어 달라고 붙잡는 간청이 아니라
괴롭히지 말고 떠나 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은 이렇게 간청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자기를 괴롭히는 분일뿐이기에
그저 아무런 상관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아무런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의 다가오심이 괴롭힘일 뿐입니다.
그래서 괴롭히지 말고 떠나달라고 간청하지만
주님께서 단호하게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하시면 다른 간청을 합니다.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며”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더러운 돼지들 안에서라도 자기들의 지역을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토록 자기 지역에 더럽게 집착하는 것이 더러운 영들입니다.
어떤 때 우리도 나의 삶의 자리를 더럽게 집착할 때가 있고
하느님의 사랑이 그저 괴롭힘으로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죄와 악습을 끊으라는 주님의 사랑이,
안주하지 말고 떠나라는 주님의 사랑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라는 주님의 사랑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사랑이
괴롭힘으로 다가온다면 나도 그때만은 더러운 영의 소유자입니다.
또 어떤 때 우리는 게라사 지방의 돼지치는 사람들처럼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달라고 청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더러운 영에 들리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돼지를 잃게 하신 주님,
자기 고장에 더 계시면 또 다른 피해를 주실 주님이 마뜩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처럼 되어야겠습니다.
한 때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주님께서 자기를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시자
주님께 함께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떤 기도를 하는 영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