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는 어떤 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자
요한이 이것을 시비 걸고 나옵니다.
제자도 아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팔고 다닌다고 그는 생각한 거지요.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것을 나쁘게 생각합니다.
누구의 이름을 팔아 자기는 이익을 취하지만
이름을 팔린 사람의 이름에는 먹칠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러저러한 자문을 해봤습니다.
내가 바로 주님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이익을 취하나,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실천하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면서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나,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을 오히려 욕되게 하나?
그리고 또 이런 질문도 해봤습니다.
오늘 복음의 그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팔고 다닌 것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되 예수님을 욕만 먹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과 반대되는 행위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 예를 들어 석가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행위를 하는 것은 어떤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요한과 달리 대범함을 보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면서 당신을 나쁘게 얘기할 리는 없다는 것,
당신을 반대하거나 나쁘게 얘기하지 않으면 당신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함으로써
좋은 일이라면 얼마든지 자기의 이름을 팔아도 된다고 허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의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기에
당신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이름을 팔더라도
당신처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만 하면 괜찮다고 하십니다.
이에 비해 요한은 주님의 이런 대범함을 닮지 않은 소인배입니다.
마치 구약 민수기에 나오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얘기와 같습니다.
모세의 천막 주변에 70 원로가 모였고
모세에게 내렸던 영이 70 원로에게도 내려 예언을 하게 되었는데,
진영 밖에 있던 두 명의 원로에게도 영이 내려 예언을 하게 되자
여호수아는 이들이 예언을 못하게 말려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요.
이때 모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나와 우리만 하느님의 자녀이고 예언자가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예언자가 되기를 모세는 바랍니다.
모세가 이렇게 가르쳤는데도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하느님을 독점하고
우리도 어떤 때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의 것으로만 독점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니고,
독점하는 순간, 그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도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도 권고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얘기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게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두의 하느님 아버지이시고,
성령은 나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내리시니 독점치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