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서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Bible, 1885)
작가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 1890)
크기 : 65X 78, 캔버스 유채
소재지 : 네델란드 암스텔담 반 고흐 미술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유럽 예술의 대종은 교회 미술이었으며 그러기에 교회는 예술을 선교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예술의 후원자요 옹호자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갈라진 형제들은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자기들의 잣대로 가툴릭 신앙과 결별하게 되면서 교회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게 되었다.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고픈 열망이 강했던 개신교 형제들에게 가톨릭교회는 예술을 핑계 삼아 복음 자체를 망각한 지나친 사치 행각을 하고 있다는 부정적 인상을 주었고 또 예술의 옹호자였던 고위 성직자, 교황들, 작가들의 관계 중에서 부끄럽고 눈살 찌푸릴 일들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교황 율리오 2세는 도덕성이나 명예욕에 있어 부끄러운 오점을 남긴 교황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죽자 그의 거대한 무덤 공사를 맡게 되었고, 그 무덤의 중심 작품으로 모세(Moses) 상을 만들면서, 교황의 얼굴을 모델로 했기에 여기에 분개한 당시 유명한 인문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가 이 파렴치함을 비난할 정도였으니, 미술이 교회 예술 활동의 한 부분이긴 해도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큰 분심과 실망을 주었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정서적, 역사적 과오의 관점 보다 근본적인 것은 바로 개신교 신자들이 십계명 중 둘째 계명으로 여기고 있는 출애굽기 20장 4-5절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 그 모양을 본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유럽 계통의 개신교에서는 이것의 포괄적 의미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출애굽기 25장에서 30장 사이에 있는 ‘성전 전례에 사용할 제구를 만들어라’는 말씀과 연관시켜 그것을 선용하되 신으로 공경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었다.
우리나라에 대종을 이루는 미국계통의 근본주의(Fundamentalist)적인 보수경향이 강한 개신교단에서는 이것을 매우 편협하게 알아들어 교회에서 사용하는 모든 성상이나 제구를 우상으로 몰아치우는 비이성적인 광신적 태도가 지배적이며 일년에 수십건의 훼불(毁佛)사건이나 성상파괴 사건이 광신적 개신교 신자들의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실 교회 역사에서 보면 오늘의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들이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예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개신교 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에서 <아름다운 마리아>라는 성모님 상본을 경배하기 위해 하루 5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추태를 부린 것을 1519년 미하엘 오스텐도르프(Michael Ostendorfer)가 제작한 <새 교회에 모인 순례자들> 판화로 남아있기도 한데, 이것을 빌미삼아 성상이나 성화를 모두 우상숭배로 몰아붙이는 것은 침소봉대(針小棒大)의 과장이다. 이런 것들은 구텐베르그(Gutenberg: 1400- 1468)에 의해 활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아주 효과적이고 훌륭한 교리 교재로서의 역할을 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출애굽기의 말씀은 형상을 만들어 신으로 공경하지 말라는 뜻이지 형상 자체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 아니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심으로서 형상은 새로운 관점으로 부각되었다. 즉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형상을 그릴 수 없는 분으로 나타나신 반면, 신약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서 하느님이 형상(ICON)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게 되었다.
골로사이서 1장 15절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씀에서 성미술(聖美術)의 가치와 당위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개신교 형제들은 구약의 어떤 구절을 물고 늘어지는 편협성에서 탈피해서 성서 전체에 함축되어 있는 성미술의 의미성과 가치를 재발견해야 하고, 우리 가톨릭 역시 성서 위주의 철저한 삶을 살고자 했던 개신교 형제들의 아름다운 전통에서 배움의 교훈을 얻을 때 성미술이 더 복음적이며 풍요로워 질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개신교 신자인 반 고호의 작품을 통해 우리와 다른 관점의 성미술을 보도록 하자.
작가는 성미술을 떠나 해바라기 그림으로 우리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화가이며 네덜란드 북부 호르테준테르에서 경건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짧으면서도 험난한 그의 인생 편력 때문에 그의 출신 배경에서부터 비극적인 요소를 보고자 하나 이것은 잘못이고 그의 집안은 명망 있는 좋은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휼륭한 목회를 한 목사였으며, 그의 숙부 중 세 명이 당시 미술계에 영향력이 있는 화상(畵商)이어서 그들을 통해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어릴 때 이미 영어와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교육을 받았다.
1875년 당시 유행하던 인도주의의 영향을 받아 숙부가 하던 화랑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조국으로 돌아와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계속되는 낙방으로 신학교 입학이 어려워지자 1878년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촌에 가서 소외된 광부들을 위한 전도사로 일하면서 그리스도처럼 가장 낮은자로서 그들의 애환을 함께 하며 살기를 원하고 그들과 같은 열악한 조건에서 가난, 질병, 불행 등을 함께 나누며 살고자 했다.
그러나 제도적인 가톨릭교회와 또 다르게 당시 그의 고향에서는 개신교도 목사라면 상류사회로 인정되는 직종이기에 작가처럼 가난에 대한 극단의 투신은 성직자들의 품위를 실추시킨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생활을 바꾸길 바라는 압력이 거세지자, 비성서적인 위선과 권위의식에 가득 찬 기성 교회에 실망을 느끼고 미련 없이 떠나게 된다.
그는 이런 위선적인 삶에 익숙해야 하는 성직을 떠나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그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이웃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삶에의 동경을 버릴 수 없었으며 이것은 그의 삶과 작품성을 일관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우리에게도 <만종>이라는 가난한 농부의 삶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잘 알려진 불란서 화가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 1875)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으며 별로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도 한 점의 위선이나 가식도 없이 살아가는 농부와 광부의 삶에서 노동을 통한 건강하고 신성한 종교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목사인 아버지의 속을 무던히 썩이게 되었고 1885년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
항상 성서적인 경건한 삶의 테두리를 지키며 살아온 목사인 아버지에게 아들의 타협을 모르는 극단적인 성격과 행동은 매번 실망과 염려의 대상이 되었다.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노라 집요히 꽁무니를 쫒다가 거절되자, 이 좌절감과 울분의 해소책으로 창녀에게 빠지는 자식을 보면서 아버지는 분노했고, 목사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이웃 사람들은 입을 모아 아버지의 속을 너무 썩인 반 고호 때문에 그 착한 목사가 죽었다고 수군거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일생 동안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산 자식으로서 불효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바친 애절한 사부곡(思父曲)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구성이 너무 간단하고 색깔 처리 역시 단조로워 <오직 성서만의 신앙: Sola Scriptura>을 강조하는 개신교 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큰 성서가 펼쳐진 조그만 탁자엔 두 개의 촛불이 있는데, 성서는 일생을 경건한 생활로 일관한 목사 아버지를 상징하며 불 켜진 촛불은 아버지의 생의 순간, 불 꺼진 초는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펼쳐진 성서위에는 ISAIE라고 적혀 있는데 구약의 이사야서 1장 2절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된다. :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워놓으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을 하는구나 !”
작가는 자식 때문에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야 했던 목사 아버지의 마음을 성서 구절로 표시하고 있다.
가장자리에 잘 놓인 성서와 대조적으로 밑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처럼 놓인 작고 허름한 책 한권은 과학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개인 보다 집단, 특히 하층 대중의 추악함을 고발함으로서 당시 유럽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던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의 소설 <생의 기쁨: La goie de vivre>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유일한 삶의 기준으로 여기는 목사에겐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버지의 속을 썩힌 작가를 상징한다.
성서 옆에 수직으로 서있는 촛대는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으로 빈틈없이 무장된 아버지의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상징하며 성서나 촛불이나 다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 반해 팽개치듯 놓인 에밀 졸라의 책은 너무도 당당한 아버지의 권위에 주눅이 든 상태에서 반항하는 자식의 초라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제목 : 착한 사마리아 사람
크기 : 73x60cm 캔버스에 유채
소재지 : 오델로 크럴러 뭘레 미술관
작가가 생존하던 시대에 성서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고 초기 크리스챤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일련의 경향이 북유럽에서 강하게 일어났고 이것은 성서적 휴머니즘(Biblical Humanism), 또는 크리스챤 휴머니즘(Christian Humanism)이라 칭할 수 있으며, 이런 경향을 지닌 사람들은 산상수훈에 근거를 둔 소박하고 경건한 생활에 강조점을 두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시대 풍조의 열매로 볼 수 있다.
작가의 신앙 여정은 위선과 타성과 형식으로 포장된 기성 교회와는 담을 쌓은, 지나치리 만큼 결벽증적인 증세를 보이는 것이었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극단의 투신,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삶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인간미 표현에 노력했으며, 자연스럽게 루가 복음 10장 30-37절에 나타나고 있는 이 주제는 작가에게 큰 영감을 줄 수 있었기에 사람 냄새나는 크리스챤적인 모델로 제시되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대표적 낭만파 화가로서 <지옥의 단테와 비르질리우스: Dante and Virgil in Hell, 1822)을 출품해 작가로서의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였고, 종교화가는 아니었지만 종교화를 많이 그림으로서 그의 순수한 마음을 담아내었기에 우리에게도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이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oudelaire: 1821- 1867)로 부터 종교화가가 부재(不在)하는 시대에 종교화를 이해한 유일한 작가로 평가받은 들라크로와(Ferdinand-Victor-Eugi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을 번안(飜案)한 것으로 들라크로와의 그림보다 밝고, 어두운 느낌을 주지 않으며, 색체는 격렬하지 않고 차분히 정돈된 인상을 준다.
위선 집단의 상징인 레위 지파의 사람, 항상 신도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사제가 사랑의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 버리고 떠난 강도 맞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당나귀에 태우는 사마리아 사람이야 말로 작가의 모습이며 작가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크리스챤이었기에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신앙관과 인생관을 표현하고자 했다.
항상 해바라기처럼 격렬한 빛을 발산하는 그의 다른 그림과 달리 이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너무 안온하고 평화스럽다. 강도만난 사람의 비참함 보다 한 인간다운 인간의 사랑과 배려를 받고 있는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서 전체의 분위기가 비참함과 불의의 고발 차원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으로 표현되는 복음을 살아가는 인간의 따뜻한 연민과 아름다운 마음씨가 돋보이고 있다.
왼쪽 아래에는 강도 만난 사람의 빈 돈 가방과 돈을 챙겨 떠나는 강도의 모습이 있으나, 이 강도의 뒷모습은 악과 포악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힘없이 걸어가는 패배자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보통 이런 그림은 색채나 내용에 있어서 극히 대조적인 강조를 하기 쉬운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관계성의 차이를 극소화시키면서 사마리아 사람, 강도만난 사람, 강도를 한 인간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작가는 강도만난 사람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여러 사정으로 강도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배려하였기에, 강도는 돈을 강탈해 떠나면서도 승리자의 힘찬 모습이 아니라 인간적인 우수와 패배감의 모습이며, 오히려 상처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위로 안에 있고 승리한 가해자가 오히려 자신의 삶을 정화시켜야 할 가련한 존재로 부각시킴으로서 인간적인 미움과 분노와 공포에서 관객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관객을 아름다운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제목 : 자화상 (Self Portrait: 1888)
크기 : 62X 52cm, 켄버스유채
소재지 : 미국, 매사추세츠 하바드 대학 포그 (Fogg) 미술관
경건하고 교양 있는 목사 집안에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된 가정 분위기라면 큰 어려움이 없이 평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텐데, 작가의 삶은 초반기부터 예기치 못한 시련과 실패의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아버지와의 불화 등으로 그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되면서 그림에 무섭도록 몰두하게 된다.
1886년 작가는 형을 무척 사랑하고 이해했던 동생 테오(Theodore van Gogh 1857-1891)가 있는 파리로 가서 거기서 자기 마음의 앙금을 제거할 수 있는 순수하고 밝은 색채를 발견하게 되면서 작가로서의 생기를 회복하게 되고 우연한 인연으로 이국적인 일본 판화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1867년 빠리에서 개최된 만국 박람회를 효시로 일본 문화가 대거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예술이나 문화의 우수성에 감탄한 프랑스인들은 일본적인 모든 것을 다 고급스럽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특히 일본의 전통 화법인 우키요에(浮世畵)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작가 역시 동생의 도움으로 일본 판화 100여개를 소장할 만큼 대단한 일본 예술에의 관심을 보였고 이것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격렬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으로 항상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면서도 작가는 인간적인 따스함을 그리워했으며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와 의기투합할 수 있는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비슷한 이상을 지니고 있던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1)을 만나면서 행복한 인생을 꿈꾸었으나 두 사람의 이상은 너무 달랐기에 비극적인 결과에 도달하면서 작가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반 고호에게 있어 예술가의 직업은 성직처럼 신성한 것이기에 어떤 물질적인 욕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폴 고갱은 자유와 원시적인 것을 갈망은 했지만 그는 철저히 현실적이었고 예술이 주는 어려움 보다 풍요에 안주하고픈 귀족주의자였기에 그들의 만남은 2개월이 지난 후 파경을 맞게 되었으며, 이 이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한 작가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발작을 일으키면서 간질 증세를 보이게 된다.
이 작품은 이런 비극이 있기 얼마 전 자기의 영원한 동료로 생각한 고갱을 위해 제작한 것으로서 인간의 따스함을 그리워하고 더 없이 맑은 삶을 갈망했던 작가의 순수한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이 이해하고 습득한 일본 미술의 영향을 십분 이용해서 자신을 동양의 수도승과 같은 모습으로 그렸다. 작가는 전 생애에 걸쳐 37개의 자화상을 그렸지만 이것은 자신을 외골수의 집념으로 수도에만 정진하는 수도승처럼, 동양 불교의 선사(禪師)처럼 그렸다.
서양사람 같지 않게 옆으로 찢어진 눈, 튀어나온 광대뼈,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임이 없는 엄격하고 절제된 얼굴 표정은 안락한 환경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해 가난과 고독, 몰이해 등을 인내하며 혼신을 다하고 있는 수도승의 모습이다.
한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로서는 예술가의 길로 바꾸었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이 아니라, 진(眞)의 추구를 통해 찾던 하느님을 미(美)의 길을 통해 추구하는 것 외에 별 다를 바가 없었기에, 자신의 모습을 수도승으로 그릴 수 있었으며 머리 주위의 붓 터치를 둥근 방향이 되도록 하며 전통적인 종교화에서 볼 수 있는 후광(後光)과 같은 경건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렇게 예술을 통해 수도승 같은 자세로 하느님을 찾고자 노력하던 그였지만, 자신의 삶을 지탱하긴 너무나 약했고 위선과 형식이 판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순수했기에, 1890년 7월 27일 자신의 가슴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고, 형의 자살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37년의 인생을 마무리 했다.
누구 못지않게 형의 처지를 이해하고 삶에 큰 힘을 주던 동생 테오도 형의 비극적 죽음의 충격을 감당치 못해 발작 증세를 일으키면서 6개월 뒤 형의 뒤를 따름으로써 살아생전에 부모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한 외톨이의 고독 속에 살아야 했던 그가 자신을 가장 이해하고 사랑하는 동생과 나란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을 동생이 얼마나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는 그들 사이에 오간 750통 이상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다.
1884년 10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런 말이 있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 없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 하게 보이더라도 열정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고호 미술관은 개인 작품을 전시한 미술관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1885년>같은 다른 화가에게서 볼 수 없는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감동적인 작품과 그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파란만장했던 그의 비극적인 삶을 바라보면서, 성서에서만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인생에 대한 깊고 맑은 사색에 빠지게 만든다.
명색이 성미술 소개 글에서 개신교 신자로서 구원의 희망이 없다는 자살로 삶을 마감한 작가의 작품을 과연 성미술이라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겠다. 그러나 예술은 아름다움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는 구도의 방편이고 보면 교회나 교리의 차원보다 하느님 안에서 보는데 훨씬 정확하고 무난해질 수 있다.
어떤 집단이건 그 집단의 이념을 절대시 하다보면 진리를 왜곡시키고 편협될 수 있음을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자기 나름대로 바르게 살려고 무진 노력했으나 여러 이유로 좌절과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야 했던 작가가 저지른 모든 잘못은 교회적인 정서안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마치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운 사연을 담은 편지 한 장도 서로 교환할 수 없는 단절의 삶을 살고 있으나, 남북 경계선에서 새들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남과 북을 서로 왕래하고 있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이나, 하느님은 교회 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알게 될 때, 개신교 신자 자살자의 작품 안에 있는 자비하시고 사랑 지극하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반 고호의 삶은 사도 바울로가 탄식한 고뇌와 같은 것이기에 자비하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으로 위안을 받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로마서 7장 19-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