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거지요.
출신 고향은 알지만 예수님 정체는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예루살렘 사람들뿐이 아니지요.
우리도 사실은 누군가를 알면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뻥을 잘 치는 사람은 겨우 이름 정도 아는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합니다.
반면 너무 고지식한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뻥 때문에 별로 아는 것 없으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애교지요.
교만 때문에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참으로 여러 면에서 모릅니다.
정말 자기는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모릅니다.
자기만 알고 남은 무시하기 때문에 모릅니다.
도무지 남을 알려고 하지 않기에 모릅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동네 밖만 나가도 아는 게 없고,
몇 시간만 지나도 앞일을 아는 게 없으며,
아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천명도 못 되고,
안다고 해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에 대해서는 오죽하겠으며,
하느님나라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게 없지요.
몇 시간 앞일도 모르는데 죽음 뒤를 어찌 알 것이며
유한한 것도 다 모르는데 무한하신 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교만한 사람은 모르는 것을 모르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만한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행복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더 알려고 하고,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너무도 기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알아가는 기쁨이 없고 뭣이든 다 시큰둥하는데,
겸손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무한하시니
모르는 하느님을 알아가는 기쁨이 참으로 무한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모르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자랑스러워하고, 더 나아가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을 다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만은 알고 있으며,
하느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사랑을 합니다.
겸손케 하고, 사랑케 하시는 무한하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고 싶게 하고 기쁘게 하시는 모르는 하느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