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요즘 요한복음을 계속 듣는데
요한복음은 1장 첫마디부터 말씀이신 주님을 얘기합니다.
“한 처음에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 6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한 처음부터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생명의 말씀이시라는 것을 계속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당신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셨다고 하고,
아브라함이 당신 오심을 내다보고 기뻐했다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매우 심오하고 웅대하게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이 말씀으로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에게 “생겨라”고 명령하신 말씀이시고,
그러므로 생기라는 명령대로 순명한 것이 생명이 되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두 가지입니다.
창세기 2장은 하느님께서 친히 흙을 오물락조물락 빚어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 숨을 불어넣어주심으로 사람이 하느님의 숨, 생명을 지니게 됩니다.
한자어 생명生命과 같은 뜻인 우리말의 목숨은
숨이 우리의 목을 드나드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창세기 2장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심으로
우리가 목숨을 지니게 되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은 하느님의 숨인 성령의 창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창세기 1장은 말씀에 의한 생명 창조를 애기합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은 2장의 하느님처럼 친밀하지 않으십니다.
직접 사람에게 내려오시지도 않고 코에 숨을 불어넣지도 않고,
저 위에 계시면서 그저 말씀을 내려 보내시어 창조를 하십니다.
“생겨라”는 명령(말씀) 한 마디로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그러니까 생명生命은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입니다.
어떤 생명도 이 명령(말씀)에 불순명한 것은 없습니다.
순명을 하였기에 모두 다 생겨난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가르침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면 살고, 계명을 어기면 죽는다는 말씀인 거지요.
그러니까 구약의 말씀은 매우 초월적이고 이토록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초월적인 말씀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 사람들은 미친 사람의 소리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소리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무의미한 것을 일컫는데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고 소리일 뿐이며
더 나아가 아무 의미도 없이 괴롭게만 하는 미친 사람의 소리입니다.
그저 인간의 말의 진흙탕에서 뒹굴던 사람에게,
다시 말해서 말의 신적인 차원을 모르고 그 체험도 없는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은 진정 말도 안 되는 무의미하고 불쾌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훈육되었다고 하는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