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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예수 그리스도(1961- 1974)
작 가 : 마르크 샤갈
소 재 지 : 프랑스 랭스(Reims) 대성당
고급 샴페인 생산지로 알려진 랭스에는 프랑스의 고딕 건축 가운데서도 준수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성당이 있는데, 이곳은 또한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으로서 프랑스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프랑켄 왕국의 클로비스 1세 (Clovis 466- 511 )왕이 이곳에서 레미지오 성인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프랑스는 그리스도교 국가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으로 평가되는 영국과 치른 백년전쟁(1337- 1453)으로 프랑스가 풍지박산이 되었을 때 , 오를레앙의 처녀( La pucelle d’Orlean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영웅이며 성녀인 쟌 다크(Saint Joan of Arc)가 나타나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에 찬 태도로 국민들의 용기를 불러 일깨우며 영국군을 격퇴하고, 프랑스의 왕가인 샤를르 7세(Charles:1422- 1461)를 옹위해서 이곳에서 대관함으로서 프랑스의 국운 회복의 계기가 마련된 곳이다.
루이 9세(1226- 1270)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일생을 경건하게 살다가 십자군 전쟁 중 병으로 죽으면서 자신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장 어렵고 비천한 백성을 돌보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성군이었는데, 교회가 그를 성인으로 인정하기 이전 국민들이 먼저 성인으로 부를 만큼 복음이 그의 정치 철학이었고 이념이었을 만큼, 고귀한 크리스챤이었기에 프랑스인들에게 이 성인은 자신들의 고귀함을 증거할 수 있는 심볼 마크로 존경받고 있다.
그런데 1914년 이곳을 점령한 독일군들이 이 대성당에 조개탄 사격을 가해 성당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내었으며 이 와중에 보물인 스테인드 글래스가 파손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이것을 복원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고 미국 록펠러 재단(Rockefeller)의 도움으로 장미창을 비롯하여 중요한 몇 곳이 복원되었으나 아직 많은 부분이 복원을 기다리는 상태로 남아 있어 전쟁의 야만성을 회상시키고 있다.
이 성당 폭격과 파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분노와 슬픔은 대단했으며 이것은 1962년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각서가 교환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성화해설 18번과 19번으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작가는 파손된 스테인드 글래스 복원 의뢰를 받게 된다. 1957년 전쟁으로 파괴된 흔적이 그대로 남은 이 대성당을 방문하면서 그는 이 대성당에서 이루어졌던 고귀한 인물들의 행적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것을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복원을 수락하여 나이 75세가 되는 1961년 성당 공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제대 뒷면에 성당의 의미를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했다.
왼쪽 유리창
이 작품은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로 전개되는 여섯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왼편 은 샤갈이 속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의 내용들이 전개되고 있다.
왼편 아래로부터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사울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기에 전쟁터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내용(역대기 상 10장 13- 14) 과 그위에 다윗을 등장시키고 있다.
다윗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으로 다듬어진 수려한 인간인데, 사울의 질투에 몰려 죽음의 위기에 까지 왔으나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해칠 생각은 않고 맑은 마음으로 수금을 타고 있었다는 (사무엘 상 19장 ) 내용을 전하고 있으며, 오른편 중간에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하느님께 통치자로서 필요한 지혜를 구했다는 솔로몬 왕의 행적 (역대기 하 1장)이 나타나며 그 아래에 이샤야 11장 1- 10에 나타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오실 구세주의 모습을 전하는 아름다운 내용에 속하는 것이다
“이새의 뿌리에서새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
프랑스와 독일은 다 크리스챤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아무 연관도 없는 이렇게 고귀한 역사를 담고 있는 대성당을 폭격했다는 것은 크리스챤도 야만적인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다시 이런 수치스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왼쪽 위에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시는 동정녀 마리아가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 그 왼쪽 위에는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백성들의 무리가 있다.
작가는 독실한 유태교 신자였기에 구약 전통에 나타나고 있는 메시아를 전하면서 그분이 바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신다는 신약의 전승과 연결시킨다.
유대교는 십자가에 달려 비참한 죽음을 맞은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니며, 자기들은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폐쇄되고 경직된 태도를 신앙에 대한 순수함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해방되어 특정 민족이 아닌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시는 마리아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시는 성모님이 우리에게 창백하고 차가운 의미로 다가오는 푸른색으로 그린 것은 뜻이 있다.
11세기 말 독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수녀가 된 빈겐의 힐데갈드 (Hildegard) 성녀는 우주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 푸르름(Viriditas)이란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하느님 사랑이 이룰 수 있는 무한한 창조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며, 성모님은 이 세상에 구세주를 모셔 오는 역할을 맡으심으로 새 생명의 창조에 대단한 기여를 하셨다는 뜻이다.
오른편 유리 창
작가는 이 대성당이 프랑스의 정신적 성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 역사 안에 드러나는 고귀한 삶을 살았던 크리스챤 왕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먼저 오른편 아래는 프랑스 교회의 시작인 클로비스 왕이 레미지오 성인으로부터 세례 받는 장면이 있고, 그 반대편 왼쪽 아래는 프랑스인들이 성왕(聖王)으로 존경하는 루이 왕의 대관식 장면이 있는데, 1160년 필립 2세부터 1825년 샤를르 10세에 이르기 까지 650년 동안 프랑스 왕들은 이 대성당에서 하느님 앞에 자기의 사명을 약속하고 확인하는 대관식을 가졌다.
프랑스의 군주제도는 혁명으로 끝장나고 인민에 의한 새로운 정부가 시작되었지만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신앙에 바탕을 둔 고귀한 군주들이 남긴 전통은 아직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루이 성왕은 역사속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도 그들의 가슴에 살아있는 자랑스러운 지도자의 상징이다.
오른쪽 위는 마태오 복음 13장 3- 33절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설명하고 있다.여기에 비유로 나타나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큰 결실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림속의 자랑스러운 지도자들의 삶에서 볼 수 있으니 신앙에 충실하라는 내용이다 .
겨자나무를 배경으로 아래는 강에서 물고기가, 공중에는 하늘을 나는 새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듯 여유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왼쪽 위는 크리스챤 삶의 핵심을 루까 복음 10장에 나타나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무인지경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 다 털리고 부상을 당해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을 구한 것은 당시 사회 지도층인 레위 지파의 사람도, 착한 삶을 가르치는 사제도 아닌, 사회적으로 천민의 처지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으며, 이 사람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한 모범 크리스챤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의를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성왕 루이 9세
중간 유리창
이 부분은 샤갈의 인생과 신앙관 전체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며 이 작품 전체의 백미에 속하는 것이다.
샤갈은 자기가 믿는 유대교의 바탕에서 시작해서 크리스챤 신앙의 정점인 예수 부활을 통해 크리스챤 신앙을 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대교는 구약을, 그리스도교는 신약을 신봉하고, 유대교는 아직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약은 구약에 숨어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혀진다. Nov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는 표현대로 그리스도안에 모든 것을 통합함으로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두터운 담을 헐고, 유대교 신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신명기 6,5)고 명하신 야훼 하느님의 완성된 모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안에서 통합하는 대단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이면은 작가의 참으로 열리고 예언적인 표현이다.
먼저 작가는 왼쪽과 오른쪽 아래 편에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공동으로 고백하고 있는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맨 아래에 창세기 12장에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부터 신앙의 출발을 설명하고 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장차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아브라함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구약 성서라는 같은 신앙의 뿌리에서 시작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자기 탈출을 시도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며 아브라함이야 말로 이런 신앙의 모범이었다.
그 위에는 창세기 18장에 나타나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난 세 천사들을 잘 대접함으로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늘그막에 아들을 얻는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모습이 있다.
그 위엔 창세기 14장에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전쟁에 이기고 돌아왔을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를 축복하며 복을 빌어 주었다는 내용이며,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넘치는 축복을 받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에 창세기 22장에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늘그막에 얻은 자기의 분신과 같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결단을 보임으로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인데, 하느님의 요청은 어떤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나 이것을 신앙으로 수용했을 때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며. 신앙 안에서의 순명의 의미성, 희생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세 개는 이 작품의 정점이며 핵심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 그리스도에게 관한 것이다. 오른편 맨 위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 반대쪽 중간엔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겪으신 주님께서 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창의 결론이었던 착한 사마리아 삶을 완벽히 사시기 위해 자신의 몸과 파를 우리에게 성체 성사로 남겨 주시고 나머지 생명 전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마지막 한 방울의 “피와 물까지 ”(요한 19, 34) 다 쏟아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유대교 신자인 작가는 여기에서 유대교의 좁고 편협한 울타리에서 해방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유롭게 된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가 말씀하신 십자가의 지혜와 어울리는 것이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곧 하느님의 힙입니다.”(1 고린 1,18)
왼편 맨 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이 작품의 정점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크리스챤 신앙에선 너무 당연하기에 생각 없이 지나치기 쉬운 것이지만 작가는 유대교에서 부정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 아들의 완성된 모습을 발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 작품 전체에서 완성된 사람들의 모습은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예를 들어오른편 유리창에서 선정을 베푸는 루이 9세 성왕의 모습이 그렇고, 글로비스와에게 세례를 베푸는 레미지오 성인의 모습도 붉은 색인데, 이것은 크리스챤 성덕의 진면모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거룩하다고 할 때 이 세상과 별개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이나 성직자에게서 성덕을 찾으려고 하나, 크리스챤 성덕은 그런 것이 아니라 완성된 사랑을 산 것이기에, 여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을 완성한 모델로서 진한 붉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충만한 사랑에서 드러나게 된다.
마치 나무가 탈 때 빛과 연기가 나지만 별로 밝지 않다가 그것이 다 사그라져 숯이 되었을 때 그 빛이 더 멀리 퍼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결코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 하느님 사랑의 극치임을 강조하기 위해 붉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안에서 작가는 하느님 구원 계획의 감동적인 위대함을 전하고 있다. 유대교 신자가 가톨릭 신앙을 인정했다는 데 위대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작가는 인간이 만든 편협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안에서 야훼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이것을 통해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유대교 신자로서 가톨릭 대성당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은 큰 감동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과 사랑의 총체이며, 어떤 이질적인 것도 다 사랑으로 수용해서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설득력있게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애국심이라는 집단 이익의 광기에 사로잡힌 독일이 이 대성당을 폭격한 것은 우리 안에 정화되어야 할 악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인류 역사에서 이런 악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에, 이 작품은 항상 “악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던지는 한편의 감동적인 강론과 같다.
1974년 6월 14일 이 작품이 봉헌되는 자리에서 작가는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대성당은 결코 아름다운 예술품을 진열하고 있는 박물관이 아닙니다.
이 작품 앞에 서는 사람은 바로 이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을 믿으며, 이것이 나의 신앙의 핵심이요, 전체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제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한 이 대성당에 바치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꽃다발입니다.“
오늘도 온 세계에서 이곳을 찾는 순례자와 관광객들은 샤갈의 작품 앞에 넋을 잃으면서 이 작품을 통해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발길이 묶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