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7년)
작 가 : 쟉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 1825)
크 기 : 유화 : 621 X 979cm
소 재 지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Louvre)
성미술의 주제는 신, 구약 성서와 성인들의 생애가 대종을 이루고 있지만, 이것 외에도 드물게 교회 역사 안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 공의회와 성지 순례를 주제로 한 것과 함께 교회와 정치권의 권력자, 특히 교황과 황제들과의 관계를 선택함으로서 교회의 성장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교권과 지상 권력의 조화와 충돌의 모습을 다루기도 했다. 대부분 황제가 교황에게 승복하는 것이 주제인데, 예외적으로 교권이 속권에 굴복해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좀 씁쓸한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주제가 바로 나폴레옹과 교황과의 관계를 다룬 이 주제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의 하나이며 17세기 루이 13세, 14세 때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서 명재상으로 평가를 받는 인문주의자 리슐리에(Richelieu: 1585- 1642)추기경의 노력으로 명실상부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현대에 와서 중국계 미국 건축가 페이가 디자인한 강철과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로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주고 있다.
모나리자를 위시해서 너무도 값진 작품들이 많은 이 미술관에 이 작품은 관객들이 많이 몰리는 작품의 하나이다.
작가는 18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나폴레옹 황제 치하에서 활동했으며 이작품을 위시해서 당시 실권자인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많이 남겼고 작품안에 작가의 인생 철학을 넣기 보다 , 철저히 권력 찬양의 성격을 일관적으로 표현했기에 많은 호사를 누리면서 살았던 어용화가의 대표이기도 하다
대단한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폴레옹을 지지함으로서 그는 작가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에서 사회적으로 예술적으로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
나폴레옹은 1769년 한때 이태리의 속국이었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젊은 지성인 사이에 풍미하고 있던 볼테르와 룻소의 글들을 읽으면서 혁명정신에 물들게 되었고, 1796년 출세의 야망에 찬 그가 바라던 이태리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면서 파죽지세의 기세로 이태리와 오스트리아를 정복하고 교황령의 군주였던 교황 비오 6세와 휴전 조약을 맺기도 했다.
그는 당시 강국이었던 영국을 점령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유럽의 대단한 힘이 있는 군주로 부상되기 시작했으며, 자연스럽게 교황과의 불편과 긴장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정복자인 나폴레옹과 교황령이라는 영토를 지닌 군주인 교황과의 관계는 정치 동향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나폴레옹은 명색이 가톨릭 신자였으나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는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를 박해해서는 안되며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서 종교적 가치가 고수되어야 함을 알았으나, 그의 개인적 신앙과 교황과의 관계는 철저히 국가 실리의 관점에서 처리되어 교황과의 관계 역시 다른 국가 지도자와 다름없는 이익을 관계성의 첫 번으로 두게 되었다.
1776년 프랑스 혁명군 장교의 자격으로 로마에 침입했던 그는 이태리인들의 깊은 신심과 교황에 대한 존경심을 보고 교황을 퇴위시키라는 혁명 위원회의 요청을 거부하고 교황청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교황도 교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유럽의 실세로 등장한 나폴레옹을 무시할 수 없기에 부르봉 왕가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실권자로 등장한 나폴레옹을 인정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런 상호 실리의 관점에서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나폴레옹과 교황의 관계는 동상이몽의 관계였고 나폴레옹은 자국내의 교회에서의 교황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자신이 정교의 양면을 한손에 넣고자 하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 교황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 교황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게 여러 면에서 필요하다는 생각에 노틀담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 파격적이며 예외적인 일이었다.
전통적인 대관식은 항상 하느님의 대리자인 교황이 “모든 권한의 주인이신 ”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새로 임명되는 사람에게 왕관을 씌우게 되어 있었고, 교황좌가 있는 로마에서 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나폴레옹은 자기 영토인 프랑스에서 대관심을 하기로 하고 교황은 실리적 관점에서 이런 예외를 수용하게 된다.
그런데 예식 중 참으로 황당한 일들이 생기게 된다.
대관식이란 하느님으로 부터 왕권을 수여받는 것이기에 주례자는 하느님의 대리자인 교황이고 , 대관되는 사람은 하느님의 권위앞에 순종한다는 뜻으로 교황이 왕관을 씌여주게 되었는데 모든 면에서 치밀한 나폴레옹을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깜짝 쇼를 연출하게 된다.
예식 중 나폴레옹은 교황이 머리에 관을 씌우려는 순간 잽싸게 그것을 빼앗아 자기 머리에 썼다.
가장 중요한 예식이 깜빡 할 사이에 이렇게 황당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참석자들은 말문이 막혀 망연자실한 사이 나폴레옹은 이 장면에서 보는 것처럼 새로운 구경꺼리를 연출했다.
즉 자기 아내인 죠세핀의 왕관을 자기가 씌우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교황의 손에서 빼앗아 쓴 왕관은 월계수로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왕관인데 이것은 자기위치가 과거 로마 제국의 황제와 같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죠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은 자기가 무너트린 부르봉 왕가의 권한을 자기가 이어 받았다는 상징이었다.
죠세핀은 나폴레옹과 결혼 전 다른 남편과 사이에 두 자녀를 둔 유부녀였고 나이도 나폴레옴 보다 연상인 40대 여인이었으나 아부에 달인인 작가는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20대 여인처럼 아릿답게 그렸다.
이 예식에는 죠세핀 전 남편 소생인 두 자녀가 참석했는데, 모자간의 구분이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왕관을 받기 위해 나폴레옹 앞에 무릎을 끓고 있는 죠세핀 (Josephine de Beauharnais : 1763- 1814) 은 잠시나마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었던 입지전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 섬에서 가난한 해군 장교의 딸로 출생해서 16세에 파리에 와서 부유한 귀족 신분인 청년 장교 보아즈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나 그의 출신 바탕에서 오는 촌티는 세련된 파리 생활에 익숙한 남편에게 항상 실망의 요인이 되어 부부 생활이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죠세핀의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촌티를 탐탁찮게 여긴 보아즈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초대되는 파티에 갈 때에도 자기 아내를 동반하지 않을 만큼 둘의 관계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렇게 남편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처지의 죠세핀의 불만과 울분의 해소책은 남편의 재산을 배경삼아 대단한 사치에 몰두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사치 생활을 하면서 그는 남편으로부터 멸시받던 촌티를 서서히 벗게되고 파리 사교계에 여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된다.
1796년 나폴레옹을 만나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유부녀의 신분으로 총각인 나폴레옹의 아내가 되어 1804년 노틀담 대성당에서의 황제 대관식에서 이 장면에서 보는 것처럼 황비의 영예를 얻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해 1809년 이혼을 당했다.
나폴레옹은 그 후 유럽에서 지도자로서 자기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권력 뿐 아니라 배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오스트리아 함스부르크 가문 프란츠 황제의 딸 마리아 루이즈와 결혼하게 된다.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 : 1791- 1849) 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이용하기 위한 국익을 염두에 둔 오스트리아의 요청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하여 나폴레옹이 원하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나 힘으로 권력의 정상을 차지했던 나폴레옹이 라이프니츠 전투에서 참패한 후 황제직에 물러나 엘바 섬에 귀양을 가게 되자, 그는 마음에도 없던 결혼에서 벗어나 청년 장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기에 나폴레옹의 몰락은 자연스럽게 그와의 결별 선언이 되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황당한 대관식이긴 해도 역시 황제의 대관식인데다, 왕권의 수여자인 교황이 참석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제단 위의 촛대가 일곱 개 놓여 있다. 일곱 촛대는 장엄한 교황 미사의 상징이다.
일곱 개의 촛대는 구약의 메노라 (Menorah)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축제인 하누카를 거행하면서 사용하던 것으로 계약의 궤를 모신 성막을 밝히는 중요한 제구였는데, 7개의 가지가 있는 것은 하느님의 7일간의 천지창조의 상징이며 중간에 있는 높은 것은 안식일의 상징이어서 위기가 있을 때 이것을 가장 먼저 옮기곤 할 만큼 신앙생활에 비중을 두는 제구였기에 성서에도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지킬 규정이다. 아론은 늘 그 등불을 야훼 앞에 있는 순금 등잔대 위에 밝혀 놓아야 한다.”( 레위기 24: 4)
이것이 중세에 오면서 우리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인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미사성제 때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교황 미사에서 이 상징을 도입해서 일곱 촛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작가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단의 일곱 촛대 아래 이루어지는 나폴레옹의 기상천외의 천박한 망동을 미화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세속의 권력 앞에 너무도 무력한 교황의 처지를 더 쓸쓸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다.
자기가 씌여주어야 할 왕관을 자기 스스로 쓰고 자기 부인에게 까지 씌우며 마치 로마 황제나 되는 양 안하무인의 처신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아야 하는 교황의 모습을 더 없이 초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초라한 역할을 감대해야 했던 교황 비오 7세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베네딕또 회에 입회하여 엄격한 수도승 생활을 했던 거룩한 성품과 인격을 구비한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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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민감한 성격으로 반대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마구 쏘아대는 성향이 있었으나, 이런 성향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힌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줄 아는 인간미를 갖춘 교황이었다.
이런 인품의 교황이 총칼로 얻어진 권력 앞에 안하무인이 된 나폴레옹의 청을 들어 파리로 온 것은 교회의 이익과 프랑스 교회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목자적 배려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권력 도취에서 온 상식을 벗어난 처신으로 교황의 처지는 더 없이 황당하고 초라해졌으며 작가는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교황 조차 초라하게 만든 나폴레옹의 승리처럼 미화시키고 있다.
작가의 의도는 나폴레옹의 영광은 유럽의 정신적 지주였던 교황권도 꺾을 만큼 대단함을 강조하기 위해 구도적으로도 나폴레옹과 죠세핀을 중심에 잡고 교황은 구석에 앉은 쓸쓸한 모습의 몰락한 노인의 인상으로 그리고 있다.
교황의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더 안하무인이 되어 전임 교황과 맺은 정교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급기야는 천년 이상 교황의 통치아래 있던 교황령을 프랑스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하자 (1809년)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
, 나폴레옹은 교황을 체포해서 북 이태리 사보나(Savona)에 감금하고 자기 취향의 조약에 서명토록 갖은 협박을 다했으나 교황은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할 때까지 조금도 굽힘이 없이 의연히 나폴레옹의 부당한 처사를 거부했다.
이상하게도 왕관 수여권을 박탈당하고 급기야는 감금되는 인간적 수모를 겪는 교황에 대한 존경심이 북 유럽 신자들간에 일기 시작했고 그가 긴 고통의 유배시기를 보내고 로마로 귀환했을 때 로마 최고 명문가 출신 청년 30명이 교황이 타고 온 마차를 호위하며 베드로 대성당을 향할 만큼 교황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기에 연금 기간 교황으로서 할 수 없었던 많은 유보된 일들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면서 교황권을 한껏 신장시켰다.
그는 당시 유럽 최고의 권력자인 나폴레옹을 반대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교회 최고 지도자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강인함을 보이는 동시에 인간적인 부드러움과 자상함도 잃지 않았다.
자기에게 갖은 고통과 수모를 준 나폴레옹이 백일천하를 끝으로 센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될 때, 복수의 기회로 삼지 않고 영국이나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그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센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 가서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임종을 맞는 순간 고백사제를 파견해서 그의 마지막을 도와줌으로서 자기에게 더 없는 고통과 수모를 준 원수까지 포용하는 어버이로서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다.
변변찮고 볼품없는 가정 배경에서 성장했기에 권력에의 야망이 더 강했고, 권력에 대한 일편단심의 집념에다 행운이 겹쳐 유럽 전체를 석권하는 황제가 되어, 안하무인의 태도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교황까지 끌어내리기 위해 나폴레옹이 벌였던 화려한 퍼포먼스의 한 장면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복음적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주제로 그 유명한 "영울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에서 용맹을 떨치던 시절 , 그는 부패한 독재 왕국을 타파한 그의 공적을 너무 가상히 여겨 그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Eroica를 작곡했으나 그가 황제가 되었단 소문을 듣고 그의 조잡한 인격에 실망의 표시로 표지를 찢어 버렸다.
이 작품을 보노라면 권력의 횡포를 종횡무진으로 휘두르는 나폴레옹을 망연자실로 지켜보는 비오 7세 교황의 모습에서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되는 하느님의 대리자요, 갈릴래아의 가난한 어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보이는 신앙의 강한 힘과 신앙안에 다듬어진 그의 고귀한 인품을 읽을 수 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16장 19절)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요한 21, 18-19)."
비오 7세 교황은 나폴레옹의 황당한 처신을 보며 그의 대선배인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위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으로 부터 이 작품 주문을 받은 작가는 다른ㅁ 성당을 노틀담 대성당 처럼 꾸미는 등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70명은 실재 모습을 그릴 만큼 이 작품은 정교하며 프랑스 미술 상 최고의 대작에 속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이 작품을 통해 작가와 전혀 반대되는 성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십자가의 지혜에 접근할 수 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1고린 1, 18)
교황과 나폴레옹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 십자가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가 대결하고 있으며 교회 역사의 어떤 순간에 교회도 십자가를 앞세우고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부끄러운 시행착오의 역사가 있었다.
이 작품은 시편의 다음 구절을 극명히 표현하고 있다.
“누구는 수레를 믿고 누구는 말을 믿고 있어도 우리만은 우리 주 하느님 그 이름으로 굳세노라. (시편 19)”
군대와 무기로 교회를 짓밟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세상 지혜의 상징이라면, 연금 상태에서 갖은 협박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의연히 대처하신 비오 7세 교황이 하느님 지혜의 상징임을 크리스챤들은 세상에 대한 승리를 전하고자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