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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바니 벨리니 - 탈혼 중의 성 프란치스코

by 관리형제 posted Oct 0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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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탈혼 중의 성 프란치스코 (1465)
작 가 : 죠반니 벨리니 (Giovanni Berlini : 1430- 1516)
크 기 : 124X 141cm 유채(템페라)
소 재 지 : 미국 뉴욕 프릭(Frick) 콜렉션.

성 프란치스코 생애 말년에 라 베르나산에서의 오상 체험은 신비적인 성격 이전에 삶의 절정체험이다. 성인은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이 온전히 주님과 일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의 삶 말년에 있었던 모든 인간적인 갈등의 해답을 주님 삶의 여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성 프란치스코에 관련된 성지 중에서 라 베르나는 단연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좀 덜 알려진 생소한 곳으로 베네치아의 산 프란치스코 델 데세르토(San Frnacesco del Deserto)라는 곳이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성인 생전에 방문하셔서 기도하셨기에 중세기부터 이태리 북부에서는 성 프란치스코의 순례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 작품은 오늘까지 이 성지를 지키고 있는 프란치스칸들과 깊은 친분을 지니고 있던 베네치아의 고귀한 귀족인 쥬안 미키엘(Juan Michiel)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인데, 화풍에 있어서도 좀 특성이 있는 것이다.

작가가 활동할 당시 베네치아는 피렌체와 함께 르네상스 예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로서 성화해설 20번에 소개되는 티치아노의 화풍처럼 원근법을 강조하던 피렌체 화풍과 달리 화려한 색채 처리로 그림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경향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주제의 특수성을 배려해서인지 이런 화풍을 피해 현재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북해에 면한 중세 국가로서 찬란하고 고유한 화풍을 일으켜 남부 유럽에 까지 영향을 주었던 프랑드르(Flanders) 학파의 영향을 도입해서 독자를 단순히 아름다운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의 삶의 절정 체험인 완전한 기쁨이라는 차원 높은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다.


작가는 복음을 완벽히 사셨던 성인의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많은 자연적 상징들을 도입하여,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나무와 동물 하나 하나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이 작품이 성인 생애의 한 표현이 아닌 생애 전체를 이해하도록 초대하고자 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오상체험이 아니라 성인의 생애 전체를 압축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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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경에 빠진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작품인 펼쳐진 자연 앞에 자신을 완전히 개방한 모습으로 태양을 향해 서 계신다. 불교식 표현으로 모든 번뇌 망상에서 해방된 해탈의 경지에 이른 성인의 곁엔 성인에게 새로운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 준 도구들이 있는데, 바로 독서대에 놓여져 있는 성경과 해골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최고 규범이요, 유일한 규범으로 삼으신 성인의 삶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으나, 여기에 놓인 성경은 펼쳐진 것이 아니라 닫힌 것이라는 데 작가의 의도가 있다.

이것은 현대 영성에서 기도 생활을 심화시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시하는 원칙과 일치하는데, 초심자가 차원 높은 기도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묵상, 관상 영적 독서와 같은 것에 몰두해야 하지만, 하느님과 일치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이것을 떠나 오로지 주님 자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작품에서 성인은 하느님과 일치 체험을 했기에 그 자체가 평소에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의 경지이기에 범인의 경지에서 해방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아득바득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 연습을 통해 수영을 익힌 사람이 수영하는 수고에서 해방되어 편안히 물에 자신을 띄워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성인은 하느님 은총의 충만한 경지에서 즐기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독서대 위에 놓인 해골은 주님이 걸으셨던 갈바리아의 상징으로 성인이 세상 모든 어두움과 슬픔에서 해방된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여정을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성인이 느끼시는 지복직관의 경지는 결코 값싼 은총이나 요행이 아니라 주님이 겪으셨던 그 모든 아픔과 절망과 고통의 갈바리아를 수용한 결실임을 말하고 있다.

성인의 말년은 인간적으로는 실패로 여겨질 만큼 참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자기 삶의 여정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었던 주님에의 사랑 때문에 오로지 복음 하나만으로 살 수 있는 삶을 시작하자, 향기로운 꽃을 찾아 벌이 모이듯 많은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복음에 바탕을 둔 형제단을 만들었으나, 형제들의 수효가 많아지면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복음을 몸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힘든 여정이기에 복음이라는 멋진 포장지로 싸여진 실천과는 무관한 그런 복음적 원칙에서 보면 허상의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들이 프란치스코를 자기 이상을 살아가는데 방해물로 여기게 되자, 성인은 말못할 고통과 번민에 빠지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 프란치스칸으로 살기에 너무 거북스럽고 불편하다고 여겨 프란치스코가 없는 프란치스코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이들이 수적으로 세력을 확보하면서 성인에게 너무 큰 놀람과 아픔을 남기게 된다.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에 나타나고 있는 “완전한 기쁨”에 대한 교훈은 성인이 갈망하던 이상이기 이전 자신의 체험일수도 있을 만큼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분은 주님 삶과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 해골은 바로 성인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십자가 체험의 상징이다.

성인이 기거하던 오두막의 천정을 향해 오르는 세 줄기의 포도는 하느님을 향해 정진하던 성인의 강한 영적 열망을 표시하고 있다. 성인이 머물던 오두막집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메일 때 함께 했던 계약의 궤를 모신 장막을 상징하며,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날 때 모세가 신발을 벗은 것처럼(탈출기 3 1- 10) 성인도 맨발을 드러내면서 “내 기쁨 내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리다”(시편 42,3)라는 찬양시편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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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끼고 있는 무화과 나무는 성인에 대한 여러 면모를 복합적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성서적 전승에서 무화과는 범죄와 육욕의 상징이라는 부정적인 면과, 번영과 구원이라는 긍정적 차원이 있는데 작가는 바로 긍정적 차원으로 처리했다.

이 작품에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복지로 인도했던 민족 지도자인 모세 (Moses)를 암시하며, 또한 야훼만이 참된 하느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엄청난 도전을 했던 엘리야(Eliah)를 상징하기도 하나 무엇보다 오상을 받음으로서 그리스도를 가장 완벽히 닮은 충실한 제자인 성 프란치스코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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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로새와 당나귀 둘 다 고독의 상징이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고독의 여정은 필수적인 것이기에 불교의 법구경에서도 구도(救道)의 길을 걷고자하는 사람은 여정에 동반할 친구(道伴)도 필요하지만 어느 시점에선 “외뿔소처럼 홀로 걷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성인 역시 긴 고독의 여정을 거쳐 오상을 통한 주님과 일치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적 삶에서의 고독은 여행길의 당나귀처럼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당나귀는 성인이 오상체험을 하신 라 베르나 산에 오르실 때 동반했으며,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던 작가는 이것을 확대해석 해서 주님이 수난하시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고가신 당나귀로 표현하고 있다.(루카 19, 28- 36)

성인은 말년에 자기의 육신을 당나귀로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역설적으로도 표현해서, 성인은 여느 인간처럼 약점에서 면제되지 않는 범인으로서 하느님의 도움 뿐만 아니라 초인적 노력을 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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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넓지 않는 초원에서 양들을 인도하고 있는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는 모세를 가리키고 있으며, 성인은 재산과 권력에 도취되어 복음적 삶에 대한 건망증에 빠져있는 당시 교회를 자신의 모범으로 개혁하고 쇄신했다는 면에서 모세에 비기고 있다.

그 위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조악하기 짝이 없고 들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다리 역시 퇴락한 모습이며, 도성을 둘러쌓고 있는 벽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고 도성안에는 내부를 분명히 볼 수 없게 가리고 있는 그림자 부분이 보인다.

한마디로 도성 입구 에서 부터 꼭대기의 성곽에 오르기 위한 여정이 혼미스럽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영적 여정의 어려움을 암시하며, 17세기 영국 개신교 작가인 존 번연의 작품인 천로역정(Pilgrim Progrss)를 회상케 한다.

이런 여러 난관을 거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산위의 도성은 조개 구름과 푸른 구름으로 어우러져 영적 여정의 어려움을 용감히 극복하고 도전한 사람들이 도착한 다른 하늘나라의 모습을 상기하며 성인은 오상을 받음으로서 바로 이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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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이 작품의 절정 표현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 월계수 다발이며, 이것은 희랍 시대부터 영광과 승리의 상징인데, 오상으로 자기 몸에 그리스도를 각인한 성인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월계수 다발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는 성인의 얼굴은 광채에 차 있다.

이 작품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작가는 원래 가장 왼편 월계수 위에 전기에 나타나고 있는 성인의 오상을 받으실 때 나타났던 케루빔 천사를 그리고자 했으나, 그 후에 현재의 모습대로 작품을 축소했는데, 이것은 작가의 깊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작가는 자연 풍광을 하느님의 뜻을 펼치는 또 다른 성서임을 강조코자 했기에 여러 동물과 식물 자연의 경관을 신앙의 하나로 모아 하느님 안에 통합함으로서 성인의 생애 말기 작품인 <태양의 노래>에서처럼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 만물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에로 우리를 초대하고자 했다.

성인이 오상을 받으심으로 묵시록에 나타나는 다음 구절이 삶의 현실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 22, 5).

작가는 성 프란치스코를 작품화 시킨 다른 작가들이 비중을 두었던 오상에 대한 기록을 접어두고, 성인의 말기 작품인 <태양의 노래>에 나타나고 있는 피조물의 찬미를 통해 성인이 도달하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모든 인간적인 갈등과 어려움에서 해방된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에 어느 작품 보다 강한 개성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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