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방인을 위해선 안 오셨다는 건가요?
그래서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이 과연 주님의 말씀인지,
주님의 말씀이 맞는다면 이것이 주님의 진심인지 의심케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방인들의 복음인 루카복음에는 이 얘기 전체가 빠져 있고,
마르코복음에는 이스라엘에게만 파견되었다는 말씀이 빠져있으며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씀도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말씀과 더불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 마태오복음의 예수님도 유대주의자가 아니고,
잘못된 선민의식의 소유자도 아님은 분명합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부분에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데 이것은 마태오복음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의 맨 마지막 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그러므로 마태오복음의 주님이 오늘 이사야서의 그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우리 주님은 이방인들을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는 분이시고,
그런 분이 아니시라면 이방인 지역을 가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11장에서 소돔과 함께 회개하지 않는 고장의 대표로
꼽으신 그 티로와 시돈 지방에로 오늘 주님께서는 가십니다.
그러니 마르코복음에서처럼 주님께서는 복음화의 대상으로
먼저 이스라엘을 뽑으시고, 이 이스라엘이 당신처럼
이방인들의 빛이 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빵도
이 세상의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고 사명이며,
그러니 자녀들에게 빵을 주신다는 것도
길 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도록 복음과 사명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젊은이들을 계도하려는 선생님이 말썽꾸러기 자기 자식부터
먼저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병은 고쳐주시고,
이방인의 병은 안 고쳐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린 마귀는 쫓아내주시고
이방인에게 들린 마귀는 쫓아내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주님의 거절은 의도가 있는 거절입니다.
이방 여인의 겸손과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려는 의도입니다.
은총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지 시험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믿음의 시험이고 믿으시기 때문에 시험하시는 겁니다.
사실 이방 여인은 대단히 겸손하였을 뿐 아니라 주님을 믿었습니다.
자기와 딸을 강아지 취급하여도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렇게 막말을 하시는 분의 진심이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믿었고,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을 차별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이방 여인이 이스라엘 남자가 만날 수 없었던 당시에
주님께서 여인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주님을 찾아옵니다.
이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해
그녀의 겸손과 믿음을 드러내신 겁니다.
누구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는 이 이방인 여인만한 겸손과 믿음이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