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사람들의 대답은 '예언자'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엘리야, 예레미야 그리고 요한, 모두 위대한 예언자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이끈다는 점에서는, 예수님 또한 예언자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에 만족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하십니다.
예언자와 하느님의 아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지만 당시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 복음서, 마태오, 마르코, 루카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 이어 수난과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십니다. 바로 이점, 수난과 부활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 이것이 예언자들과 다른 모습입니다. 그리고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면, 구원은 예수를 통해서만 오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본다면, 수난에 대한 언급이 오늘 복음 뒤에 있고, 또한 수난은 복음의 끝, 예수의 생애 마지막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본다면, 베드로가 '수난과 부활'을 생각해서 그렇게 대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살과 피가 아닌', 즉 논리가 아닌, '아버지', 혹은 성령에 의해서 대답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형제, 자매님들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옛 사람들이 이야기 한 것처럼, 그저 한 예언자, 진리를 말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진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표현하고, 다른 종교들도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진리는 다른 종교가 말하는 진리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진리는 하나이기에, 그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혹은 그 진리를 말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즉, 수난을 통해 부활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구원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기에 그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도 똑같은 방법, 즉, 수난을 거쳐야 부활에, 진정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수난이 없이는, 고통이 없이는, 부활도 없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도 없고, 그렇게 구원을 얻는 것에 실패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이며, 세상 안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끌어안겠다는 의지입니다.
삶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운 곳으로 바뀌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쩌면, 다가올 부활을 희망하면서 고통을 견디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