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Il Cristo Risorto)
작가 : 페리클레 파치니 (Pericle Fazzini 1913-1987)
크기 : 청동 20*7*3m
소재지 : 바티칸, 나르니(Narni) 교황 알현실
사도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바티칸은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선의를 가진 모든 크리스챤들에겐 성지임과 동시 신앙의 요람이다.
바티칸은 인간 문화와 예술의 많은 보물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미켈란젤로의 최후 심판이 그려진 시스틴(Capella Sistina) 경당을 위시해서 신앙이란 최고의 가치를 살고자 했던 인간들이 만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이 대부분은 신앙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인간의 약점이 묻어 있어 교회가 정직히 강조하고 인정하는 "죄많고 거룩한" 양면의 모습을 정직히 보이기도 한다.
시스티나 경당으로 가는 길 왼편엔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자기 딸 루크레치아를 결혼시킨 "보르지아(Borgia)방"이 있는데, 부패하기로 유명했던 교황이 자기 딸을 버젓이 교황청에 불러들여 결혼시켰다는 부끄러운 이 흔적은 교회의 어두운 면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쉼 없는 회개와 자기반성으로 거듭 태어나면서 이제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만이 아니라 선의를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티칸의 예술품 중 이 작품은 너무 많기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무심히 넘어가지 쉬운 그러면서도 오늘 가톨릭 교회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작가는 이태리 서쪽의 그로타마레(Grottammare)에서 흑단세공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조각을 배워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내었다. 로마에서 공부한 후 1953년엔 일본에 가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교수 자격가지 취득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일본 체험은 이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작품은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성 베드로 성전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만날 장소를 준비하면서 그 중앙에 배치하고자 작가에게 부탁한 것이며 제작에 십년의 세월을 소비한 내용뿐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대작에 속한다.
교회의 심장과 같은 자리에서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만난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신앙의 현실을 알려주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에 이 작품은 상징면에서도 대단한 비중이 있으며 작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20세기 탁월한 성미술 작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작가는 "부활"이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정점인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부활한 주님과 그 분의 부활 사건이 있었던 세상이란 두 면을 깊은 신앙의 사색을 통해 결정했다.
작가는 일본 체험에서 여과된 결정으로 제국주의 야망을 확장하기 위해 갖은 악행을 서슴치 않았던 일본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맞고 나서 항복함으로서 일본과 그 주위 국가가 해방 체험을 하게 된 것을 예수의 부활 사건과 연결시켰다.
즉 일본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악행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2000년 전의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서로 연결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믿어지지 않는 기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의 악과 어두움에서 해방 체험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작가는 단순히 신앙의 주제를 멋진 작품으로 만드는 기능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대단한 신앙심을 가진 크리스챤이었고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작가의 신앙 표현이었다.
작가는 20세기 인간 야만성과 비인간성의 상징인 군국주의 사고방식으로 일본이 저지른 많은 학살과 강탈의 죄 값으로 받은 원자탄 투하를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완악한 유다인들과 연결시키면서 부활의 현실성을 심화시켰다.
또한 원자탄이 떨어진 작품의 현장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기도하셨던 올리브 동산으로 설정함으로서 세상에 악을 제거하시기 위해 성부께 매달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재현시켰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원자탄이 투하되어 완전히 박살난 참혹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시는 모습이시다.
실재로 작가는 교황청으로부터 이 작품을 의뢰받고 주님의 부활이 준비되었던 장소인 예루살렘의 올리브 동산에 가서 깊은 기도 중 작품 구상의 영감을 받았다.
이 작품은 붉은 청동과 노란 색의 놋쇠를 배합하여 제작되었기에 원자탄 투하 현장이라는 전쟁의 참상과 부활이라는 최상의 영광을 조화롭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특징인 모든 것을 정적이 아닌 동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여기에서도 사용해서 자칫하면 조용하고 정적인 것으로 표현하기 쉬운 이 주제를 최대한 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먼저 주님의 모습은 세상을 축복하는 주님이시거나 기도하시는 주님과 같은 전통적으로 표현되던 성스러운 분위기의 정적 표현이 아니라 완전히 춤추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자탄 투하 현장에 나타나는 살인적인 굉음과 폭풍이라는 공포 분위기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작가는 여기에서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원자탄 투하로 을씨년스러워 진 참혹한 현실에서 주님이 부활하시면서 새로운 현실이 시작됨을 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이라는 수난의 주제를 너무나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이 참상의 현장에서 고뇌하거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춤추는 모습으로 나타나 계신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새 생명으로 부활하시어 다시는 파괴될 수 없는 희망을 약속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모습이다.
하늘을 향한 몸짓, 팔을 벌려 가슴을 한껏 열고, 손은 하늘을 향하면서 모든 것을 다 포옹하려는 열린 몸짓으로 계신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 나에게 오라"는 성서 말씀을 너무도 정감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이다.
흩트러진 수염에다 전체적으로 불균형으로 놓인 몸 자세는 어디에도 하느님의 뜻외에는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부활의 승리와 영광으로 이어지기 위한 영적 여정의 어려움을 그분의 얼굴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승리와 영광을 표현하기엔 가냘픈 몸매, 풍요와는 거리가 먼 여윈 얼굴, 고통스러운 몸짓은 영적 삶에 반드시 필요한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미학적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 주위엔 올리브 가지들이 주님 몸처럼 바람에 춤추듯 움직이고 있다. 원자 폭탄으로 박살난 죽음의 흔적과 같은 잔재들과 함께 생명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가 절묘한 공존을 하고 있다.
올리브 가지는 신과 인간 사이의 평화의 상징이었으며, 성서에 보면 인간의 범죄를 징벌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벌로 홍수가 내려 온 세상이 다 침수되었을 때, 방주 안에서 지내던 노아의 가족들이 바깥 상황을 알기 위해 비둘기를 보냈을 때 주둥이에 올리브 잎을 물고온 것을 보고 하느님의 징벌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도 있다(창세 8:11).
주님께서 수난 전날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부활하신 후 올리브 동산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올리브의 상징은 부활하신 주님과 연결되기에, 작가는 파괴의 상징인 원자 폭탄의 잔재와 생명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주님 곁에 연결시키고 있다.
인간현실의 비참함, 잔인함, 비정스러움의 현실에서 행복과 평화와 사랑이 솟아남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자탄 투하로 뿌리까지 뽑혀 하늘로 치솟고 있는 불안하고 당황스러운 현실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새 생명으로 오시고 계심을 복음의 역설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 온 것처럼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1)
너무도 정감적이기에 가족에의 그리움을 일깨우는 가족상으로 유명한 현대 영국 작가인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는 그를 20세기에 손꼽을 수 있는 작가라고 평했는데, 성서적 인간상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작가야 말로 지난 세기를 살았던 준수한 크리스챤 예술가이며 이 작품은 크리스챤 신앙의 중심인 바티칸에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만나는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주제임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신자들 뿐 아니라 온 세상 인류의 인도자로서 고심하시는 교황의 역할을 부활하신 주님과 연관시킨 것은 대단한 의미성을 주고 있다.
신앙의 시각 안에서 작품성을 찾았던 그의 삶은 어떤 면에서 기인(奇人)의 인상을 줄 수 있으나 실재로는 전혀 달랐다. 여러 시인과 작가들과 신앙인들과 깊은 교류를 하면서 그는 너무 개방적인 삶을 살았기에 이 작품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공중을 나는 새처럼 해방과 자유의 메시지를 막힘없이 전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교의적으로 너무도 정확히 자주 표현된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줄 수 없었던 새로운 감동을 가르치고 있다.
신자들을 알현하고 있는 교황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해야 하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이 작품의 의미성을 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작품을 보게해주신 神父님께 감사하며 옮겨갑니다. ^^
이 작품을 꼭 제 눈으로 직접 봤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살면
언젠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