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주님의 첫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첫 제자, 그중에서도 시몬 베드로가 주님체험을 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주님체험을 위해 오늘 복음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루카복음에 의하면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장모가 기적적으로 치유됐음에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고기잡이의 기적을 보기 전 예수님께 대한 그의 호칭은 <스승님>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승님이라고 부르던 그가
기적을 체험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가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같은 기적인데 왜 장모의 치유 기적을 통해서는 주님 체험을 못하고
자기의 고기잡이 기적을 통해서는 주님 체험을 하게 되었을까요?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것입니까?
남의 기적은 대단치 않고 자기 기적만 대단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도 자기중심적인 면이 없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의 자기중심성은 교만한 자기중심성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교만한 자기중심은 자기밖에는 없고,
자기 외의 다른 존재는 하느님까지도 무시하지만
하느님 체험의 자기중심은 매우 겸손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 앞에 무릎을 끓고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체험의 자기중심성은 교만한 타자소외화가 아니라
겸손하고 인격적이며 개인적인 하느님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하느님이어도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나의 하느님이어야 하지 객관적인 하느님은 소용없습니다.
더 나아가 나의 하느님일 뿐 아니라 나의 주님이어야지
객관적인 하느님은 내게 도무지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시몬 베드로를 이토록 겸손하게 하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체험하게 하였을까요?
허무체험, 허사체험입니다.
나의 존재의 허무성.
나의 업적의 허사성.
시몬 베드로의 경우는 자기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
허무체험에 이어 죄인체험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지금껏 자기 힘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과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뒤
주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한 편으로는 자기의 허무를 깨닫고
다른 한 편으로는 교만했던 자기의 죄를 깨닫습니다.
허무와 허사 체험을 통해
유한한 자기, 교만했던 자기를 겸손하게 깨달을 때
이때가 성령의 때이며 하느님을 주님으로 만나는 때입니다
오늘, 주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