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어느 한 순간 고통이 아닌 순간이 없습니다. 물론 삶의 고통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행복한 기억보다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더 오래 남습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사람들은 많은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병이 주는 고통, 늙어감에서 오는 고통, 그것에 덧붙여 마음의 상처에서 오는 고통. 덕분에 의학이 발전하고, 심리학이 발전했지만, 궁극적인 고통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구약에서 고통은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유교도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 한 편에는,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욥기가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욥이 하느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과 욥이 고통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입니다. 또한 우리 주위를 보아도,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 받고, 죽게 되는 것을 볼 때, 꼭 죄에 대한 대가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됩니다. 피조물이기에, 신이 아니기에, 완벽하지 않기에, 피해갈 수 없는 그 무엇. 그리고 그것의 최종적인 상태는 죽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시키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게서 살아 계시는데, 인간은 왜 고통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하느님께서 계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사람의 아들의 들어 올림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순간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르코 복음의 그리스도는 그것을 하느님의 버리심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요한복음 17장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고 표현합니다. 부활을 희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영광을 꿈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는 영광을 이야기했고,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했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부활을 믿지 못했지만, 이른 아침 한 여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고통스러운 순간들, 벗어나고 싶은 시간들,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우리를 더 큰 고통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나의 약함을 바라보고 싶지 않고, 나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의 실수는 마음 아픔으로 다가오고, 그것에 대한 비난은 가시가 되어 나의 마음에 와서 꽂힙니다. 고통을 잊고자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그 고통은 생생한 기억으로 다가옵니다.
그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반드시 있는데, 그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의 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약함을 드러낼 때, 한 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한 없이 무너져 내려간 그 곳에도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고통 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내 고통 속에서 함께 함을 생각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항상 함께 하고, 결국 그리스도가 죽음을 통해 얻은 그 영광에도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