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오늘 복음은 뜻밖의 상황을 전해줍니다.
하나는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녀가 바리사이의 집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례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 우선 이례적입니다.
매우 이례적이기에 왜 그가 예수님을 초대했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집에, 그것도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대단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한 바리사이도
아직 주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주님은 누구를 가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안 만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나 주님을 찾아온 죄녀나 다 만나주십니다.
자주 바리사이와 부딪히고 그들을 꾸짖으신 것을 알고 있는 우리 중에는
바리사이의 초대를 주님께서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주님은 그 초대를 거절치 않으시고 그와 식사를 같이 하십니다.
애초부터 바리사이를 배제하지 않으셨다는 표시이고,
당신의 구원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신다는 표시입니다.
주님께는 모두가 당신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인데
자신의 죄를 모르기에 용서를 청하지 않는 죄인과
자신의 죄를 알고 용서를 청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죄녀는 자신의 죄를 알고 용서청하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여간내기,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감히 외간 남자들의 식사자리에 찾아온 것이 보통이 아니고,
와서 대단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더더욱 보통이 아닙니다.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런 용기를 내게 한 것일까요?
그야말로 여인 자신의 용기일까요, 누가 용기를 내게 한 것일까요?
여인 자신의 용기라면 여인의 무엇이 이리 용기를 내게 한 것일까요?
우리 성서의 번역은 주님의 용서가 먼저 있었기에
여인이 감히 용기를 낸 것처럼 얘기합니다.
“이 여인은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제가 가지고 있는 다른 성서들은, 다시 말해서
200주년 성서나 개신교 성서나 영어 성서는 모두
여인의 사랑이 커서 용서를 받은 것으로 얘기합니다.
그러나 “적게 용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은 똑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 나름대로 종합적인 정리를 하면 이런 것일 겁니다.
여인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보이고 감히 찾아갈 용기를 낸 것은
주님께서 죄인들과도 잘 어울리시고 죄인도 용서해주신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들에 대한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용서가
죄녀의 사랑과 참회를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고
주님의 사랑을 사랑한 죄녀의 용기가 주님을 찾아가게 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튼 복음이 얘기하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이
죄는 주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매개체입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하시고,
죄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용서의 은총이 내려진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햇빛에 너는 빨래처럼
우리의 죄를 감추지 말고 주님의 사랑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뻔뻔해서도 아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