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해변의 수도자(1809)
작가 : 가스팔 데빗 프레드릭 (Gaspal david Fredrich : 1774-1840)
크기 : 400 × 273cm
소재지 : 독일 베를린 다할렘 미술관
중세기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 오는 과정에 성미술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양과 질에 있어 저하 현상이 생기게 된다.
과거 성미술의 중요 주제였던, 예수 탄생 예고, 예수 성탄, 십자가, 부활 등의 주제는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던 계몽시대가 도래하면서 비지성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반면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반 소재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으며, 낭만주의자들이 주로 다루던 풍경화를 통해 종교적 의미성을 부여하는 작풍이 생겼는데 이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 대표작이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스웨덴의 경건한 루터교 신자 가정의 10명의 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을 만큼 유복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행복 체험과 반대로 작가는 가족들이 잇달아 사망하는 충격과 슬픔을 겪는다.
그는 이런 슬프고 고독한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해 예술에 몰두했다. 이런 과정에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갈망하면서 땀땀이 신학에도 심취하게 되고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에 눈뜨게 된다. 즉,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여겼던 이 세상의 모든 것, 특히 자연의 진정한 의미성이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화나 성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께 접근하기 위한 좋은 도구로 하느님의 작품인 자연에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 이것은 개신교 미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자연은 하느님의 자기계시임을 알게 되자 자연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풍경화야 말로 신앙의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자연을 묘사한 풍경화를 낭만주의적 표현의 종교화로 승화시킨 대표적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하늘, 바다와 땅인데, 이것은 공기와 물과 모래라는 인간 삶에 필수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자연은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어떤 의미의 대성당이다.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수도자는 땅끝에 서 있다.
수도자는 전체 화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얼굴 모습을 통해 그의 신분이나 인격은 전혀 알 수 없게 등을 돌리고 자기 내면의 세계로 부터 외부 세계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그는 자연의 무한한 모습에 압도 당한채 자연을 응시하고 있다.
자연을 응시하는 수도자는 두 개의 상반된 정서에 빠지게 된다.
즉 광활한 대지안에 서 있는 자기 존재의 무력함과 절망.
그리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 자신의 무력감에서 탈피하고픈 비상과 활력의 감정이다.
수도자란 인생의 진실을 하느님 안에서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의이기에 삶의 진정한 실상을 찾고자 하는 사람의 모델이다.
미세한 점과 같은 인간의 형상을 감싸듯 더 없이 넓고 깊은 바다와 높은 하늘이 있다. 작가는 한껏 넓은 바다의 수평적인 구도를 강조해서 바다와 하늘은 유한한 인간이 지닌 무한에의 갈망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한히 확장되는 자연 공간은 그에게 있어 초자연 세계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변하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더 고독감을 느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유한한 처지에서 이 모든 것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무한을 갈망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존재에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작가의 이런 견해는 당시 지성인들에게 유행하고 있던 범신론적인 경향에 영향도 받았으나 이것을 그가 믿는 크리스챤 신앙으로 수용해서 “만물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으로 표현함으로서 경건한 크리스챤들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시련이나 고통은 알 수 없다거나, 자연적 관점에서 보면 체념과 절망으로 이어지지만 이것이 초자연 세계에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 섭리에 의탁한다는 신앙으로 수용될 수 있는데 작가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나 고독에 빠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안으로 깊이 함몰해서 폐쇄의 양상을 띄게 마련이나, 이것을 신적으로 승화시킬 때 그는 자신의 고독에서 해방되어 하늘과 바다를 통해 상징되는 무한과 영원에의 그리움과 희망으로 자기 폐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미세한 점으로 표현된 수도자의 인간 모습은 시편에서 드러나는 곤궁한 처지에 처한 인간이 바치는 다음과 같은 의탁의 기도를 상기시킨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디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 땅 만드신 그 님 한테서
.....................................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시편 120: 1, 4-5)
바다와 하늘로 표현되는 무한한 공간은 초자연 세계의 상징이며, 그러기에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수도자와 자연은 자연과 초자연, 인간과 하느님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에 있어 자연, 바다와 하늘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지성소요, 대성당과 같이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작가는 과거 성미술의 주제에 접근함으로 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신비체험을 하느님의 작품 전시장인 자연 안으로 끌어들였고 이것은 당시 지성인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유럽 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인정된 쇼펜하우어(Schopenhauer)와 괴테(J.W Goethe)로 부터도 대단한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 작품성에 감동받은 독일 황제 프레드릭 3세는 이 작품을 구입해서 개인소장으로 남길 만큼 사랑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미술의 주제가 단순히 성서적 사건이나 내용에 묶여 있던 것을 해방시켜 하느님의 작품인 이 세상 전체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의 공간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낭만주의 풍경화는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본성인 무한성에의 갈망으로 초대하고 있다.
무한성은 구체성이 없는 허황한 가공의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영원하며 신적인 것의 구체적인 실현과 같다.
작가는 자연을 주제로 한 풍경화를 현대적 의미의 종교화로 격상시킨 사람이 아니라 낭만주의 화풍의 특징인 숭고미를 가장 표현했다는 것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현실적인 면에서 볼 때 종교 미술은 과거와 달리 현실감이 없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 많이 퇴색되었거나 아니면, 세상의 아름다움에 밀려 일상생활 공간에서 멀어져 가고 있으나 작가의 작품은 자연을 신앙안으로 끌어들임으로서 성미술의 새로운 영역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작품은 구약성서 집회서 저자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주님께서는 한 처음 당신의 작품들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것을 지어내실 때 제자리를 각각 정해 놓으셨다.
.......................................................
그것들은 서로 부딪치는 일도 없고
그분의 말씀을 영원히 거역하지 않으리라.
........................................................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집회서 16:26, 28, 17:8)
작가는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적 풍경화의 표현으로 하느님을 향하도록 인도했다는 면에서 성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과거처럼 종교적인 주제만으로서가 아니라 극도로 세속화된 세상 안에서 만나게 되는 자연이나 다른 것들을 신앙의 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