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자 선 (Charity : 1611)
작 가 : 바르톨로메오 스케도니( Bartolomeo Schedoni 1578- 1615)
크 기 : 캠퍼스 유채 180 X 128cm
소재지 : 이태리 나폴리 카포디몬테 (Capodimonte)미술관
작가는 이태리 모데나 출신으로 파르마로 옮겨와 화가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 명성을 떨치던 페데리고 쥬카리의 문하에 도제로 들어가 익힌 후 당시 파르마의 실세였던 파르네세(Farnese) 공작의 집에서 일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전성기에 있던 파르마(Parma)는 바로크 예술의 전성기를 구가할 때 였기에 그 배경으로 많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예술 활동과는 달리 심심풀이로 익힌 도박 횟수가 늘어나면서 많은 돈을 잃자, 실의에 빠져 자살로 삶을 마감함으로써 안타깝게도 원숙기에 기대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미완성의 인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은 중세기 자선의 주보 성녀로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St Elizabeth of Hungary : 1207- 1231) 왕비의 생애의 일화를 주제로 한 것이다.
성녀는 헝가리의 왕 안드레아의 딸로서 태어나, 14세에 튜린기아(Turingia)의 왕 루도비꼬 4 세와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았다.
그는 왕비였으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심취할 수 있는 세상의 영화나 허영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자기 직무에 충실을 기함과 동시에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는데 헌신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일생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성서의 주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통이 다가왔다.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서 전사하자 왕위를 노리는 시동생의 술수에 의해 자녀들과 함께 부당하게 궁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예기치 못했던 충격적인 비참함을 그는 신앙으로 담담히 받아 들였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 는 말씀에 깊이 공감했기에 졸지에 과부가 된 그녀의 처지에서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 평화 속에 머물도록 했다.
궁전에 쫓겨나자 궁핍한 처지가 된 가운데서도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자선에 헌신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의 회원이 되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인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투신하며 살다가 1231년 세상을 떠났다.
성녀가 생전에 보인 가난한 사람들을 자선에 대한 일화가 너무 많기에 이 작품은 당시 교회에서 가진 사람들 기득권이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 돕기에 관심을 키워야 함을 촉진하는 교육적 목표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왕비로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왕궁에서 쫓겨나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자기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는 모습이다.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을 돕는 수직 하향식 자선이 아니라, 자기도 넉넉지 못한 처지에 있지만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다는 수평 형제적 차원의 자선의 모습이다.
한 여인이 형제로 보이는 두 명의 거지 소년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고 있다.
그녀가 건네고 있는 빵은 광주리에 담긴 푸짐한 빵이 아니라 자기가 먹기 위해 준비한 것을 일부 나누는 것 같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형색의 빵이다.
동생으로 보이는 거지가 빵을 받고 있는 옆에 지팡이에 의지한 형으로 보이는 장님이 관람객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는 옆에 있는 거지 소년의 형이기에 나이는 든 게 확실하나, 장님으로서 만고풍상을 겪은 그의 이력서가 얼굴에 드러나고 있다.
그가 앞을 보지 못함으로서 동생을 보지 못하고 관객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데, 그의 투명한 눈알이 그의 가련한 처지를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는 한손을 빵을 구걸하는 동생의 어깨를 잡고 있는데, 이 어린 동생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그의 가련한 처지가 더 애잔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다른 사람은 그의 가련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담한 처지이다.
어린 동생은 여인으로부터 빵을 받으며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장님인 형까지 부양해야 하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어린 거지에게 있어 빵을 주는 이 여인은 바로 공중에 나는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약속하신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 이다.
여인의 표정으로 보아 두 명의 거지 소년과는 전혀 다른 기품 있는 귀부인으로 보이나 그 옷차림은 그의 처지가 그리 넉넉지 않음을 보이고 있으며 더욱이 이 부인 역시 거지처럼 맨발인 것을 보면 이 여인의 내면이 보인다.
엘리사벳 성녀가 남편과 사별 후 왕궁에서 쫓겨난 처지의 그의 어려움이 깃든 모습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한 해바라기와 같은 믿음이 있는 그에게 그의 궁핍해진 처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왕비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왕궁에서 쫓겨난 성녀는 자기도 어떤 면에서 거지처럼 궁핍한 처지이나, 더 어려운 사람, 자기 처지의 사람에게 자신을 준다는 마음으로 나누는 모습이다.
이 여인은 이 거지 소년들안에 있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만났기에 이 여인의 자선은 신앙행위와 같다.
성녀가 입은 흰색과 붉은 색의 옷은 어린 과부로서의 그의 파란만장의 삶에서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 순수한 영혼의 상징이다.
남편과의 사별, 왕실의 암투에 의해 왕궁을 떠나야 했던 그의 슬픈 삶에서도 어떤 미움이나 절망의 상처도 없는 그의 맑은 영혼의 모습이며 붉은 옷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꺼지지 않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의 상징이다.
성녀의 모습에서 크리스챤 신앙이 강조하는 품위의 진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크리스챤 신앙에서 품위란 어떤 사회적 지위나 인간적 능력이나 자질과 무관한 하느님을 닮은 모습과 연관 짓고 있다.
성녀는 과거 왕비였던 여인도, 지금은 퇴출되어 모든 것을 박탈당한 박복한 인간도 아닌 하느님의 사랑 속에 살고 있는 자녀로서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 이 여인의 기품은 하느님을 닮은 고귀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혀 성격이 다른 시혜자와 수혜자들이나 모두 맨발로 서있는 것은 이들이 모두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사람임을 표현하고 있다.
빵을 나누는 것으로 구성되는 전체 구도에 예외적인 모습으로 어린 소년이 등장해서 관객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비록 입은 옷은 별것이 아니나 두 명의 거지 소년과 전혀 다른 신분임이 드러나고 있다.
성녀가 결혼생활을 통해 낳은 아이가 3명이었는데, 그중에 막내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왕족의 혈통을 받은 아이가 왕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서민으로 강등된 처지나 그의 외적인 매무새와는 달리 어린 왕자의 기품이 내면에서 풍기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이 작품에서 어디에도 전혀 연관되지 않는 모습이나 관객들에게 있어 변두리가 아닌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이 바로 이 소년이기 때문이다.
이 소년은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뒤에 전개되고 있는 고귀한 자선행위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분위기는 피상적으로 볼 때 좀 애잔스럽고 인간적 슬픔이 깃들인 모습이다.
남편을 잃은 과부의 처지에 시동생의 농간에 의해 재산과 왕비로서의 지위까지 박탈당한 여인이 거지 소년에게 넉넉지도 못한 처지에서 빵을 주는 모습은 인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작가는 의도적으로 크리스챤 자선의 가치만이 아니라, 이것을 멋스러움으로 표현함으로서 삶의 어떤 정황에서도 표시하기 어려운 밝은 감동을 전하고 있다.
크리스챤들은 자기가 먹는 것에 대해선 절제나 금욕의 차원이 강조되나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이것과 전혀 다른 미덕의 차원임을 믿고 실천하면서 자선을 인간으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멋스러움으로 승격시키고 있다.
작가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말씀처럼 크리스챤적인 자선의 넓고 깊은 모습을 시원하게 표현함으로서 보는 사람에게 비참한 처지에서도 느낄 수 있는 기품있고따뜻한 감동으로 관객들을 토대하고 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루카 14: 12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