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저도 기도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어려움이 생기기 마련이고,
특히 기도를 잘 하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어려움이 크기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면 저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그분은 ‘그 기도 말고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또 그 기도 말고 무슨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느냐 묻습니다.
주님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보다 더 나은 기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기도하는 것을 배우려는 열의가 있는 것은 좋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기도의 방황, ‘기도 찾아 3만 리’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방황을 해야지 방황치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니
기도의 방황을 하되 빨리 끝내고 이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제자가 청했을 때
향심기도니 렉시오 디비나니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시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으니 이 기도에 천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셨고
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날 수만 있다면 기도는 끝난 것입니다.
어제는 참으로 달이 밝았고, 지금 이 새벽에도 달빛이 교교한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것은 달빛을 맞는 것도 아니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도 아닌, 바로 달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야 하는데
만일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느낌이 멀기만 하다면
저처럼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느님 어머니라고 불러도 좋을 겁니다.
저는 요즘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어머니를 같이 부르는데
이렇게 부르니 하느님이 더욱 인격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다가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를 우선시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은 만나지 않고 혼자서 독백만 해서도 안 되지만
하느님 앞에서 아버지는 도외시 하고 자기 넋두리만 해서도 안 됩니다.
실상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난다면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고,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는 나라가 오기를 기도할 것이고,
그리고 기도한 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곧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와
유혹에서 벗어나는 구원은 자동으로 그리고 덤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나라를 청한 다음 이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청하는데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저희에게”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같이 만나야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과 나의 대면이긴 하지만
하느님과 나만의 대면이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 이웃도 만나고,
이웃과 함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한 번 기도해보시겠습니까?